돈벼락이 날벼락이 된 故 이옥자씨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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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제닛 리’(이옥자)란 분을 알고 계신분들이 많을 것 이다. 1997년 1800만불 짜리 복권이 당첨되어 널리 화제가 된 분이다. 그는 우리동네(세인트루이스)에서 가발가게를 하며 혼 자서 1남2녀를 기르며 힘들게 살다, 하루아침에 큰돈이 하늘에 서 떨어져 유명인이 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카나한 미조리 주지 사, 게파트 하원 민주당 원내총무…같은 거물 정치인들과도 어 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신분이 급상승했었다. 한인회장, 평통위 원도 역임했다. 돈의 엄청난 위력을 보여준 그의 행보는 당시 세 간의 부러움과 또한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복권당첨후 8년만에 그 많은 돈을 탕진하고 말았다. 그 리고 정부 보조 임대아파트에서 영세민 보조금을 받으며 고독과 노구와 싸우다 지난 3월,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 검은 가족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장례 문제 등으로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전현직 한인회장들이 나서서 비용 을 갹출, 한인노인단체 몇몇 회원들만이 참여한 가운데, 동네 공 동묘지 납골탑에 간신이 안장되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때가 아마 그가 복권을 탄 2-3년 직후였을 거다. 그가 이곳 명문 워싱턴대학교 법과대학에 150만불을 기 부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우리 한인사회에서도 은 근히 그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 자기 그가 내 사무실에 나타났다. 한국 여성 월간지 두어 권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얘기부 터 털어놓았다.

“내가 복권을 타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가 기른 1남2녀의 생모 (生母)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찾았다. 이 얘기가 여기 잡 지들 (여성동아, 여원?)에 실려있다. 당신이 발행하는 <한겨레저 널>에도 게재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 들에 대해 얘기했다. 결혼 첫날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시어머 니가 하신 말씀이 “너의 남편에게 아이들 셋이 있다. 이것도 너

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는 청천벼락이었다고 한다. “총각인 줄 알았는데 아이가 셋이라니…” 기가막혔지만, 결국 받아들였 다며, 평생 자신은 아이를 낳지 않고 남편 아이 3남매만을 길렀 다고 덧붙였다.

워싱턴대 150만불 기부의 실제 동기도 그가 기른 딸 하나를 입 학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기여입학을 한 그 딸은 졸업후 변호사 가 되었다. 그밖에 알려진 기행(奇行)과 선행이 수없이 많다. 8 년간의 화려했던 삶은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수많은 화제를 뿌렸 고, 찬사와 악담도 뒷따랐으며 공과 과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 사 이에 극명하게 갈렸다.

납골봉인식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의 회고담도 있었다. 나도 한 마디 했다. “내가 가까이 본 고인은 아주 착한 분이었다. 눈물도 많았다. 우리는 고인이 살면서 행했던 자선(慈善)만은 그게 진심 이든 가식이든 최소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면 말이다. 부정적인 면만 얘기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어 느 누가 이에 자유로울 사람이 있겠는가. 고인이 살면서 행했던 선한 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의 삶을 그런 선행으로 채 워가는 일이 중요하다.”

돈을 가졌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복권을 탄다 면”하고 너그러운 삶을 그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림처 럼 예쁘게만 그려지지 않는다. 욕심 덩어리 인간이기에 그렇다. 식욕, 색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끝도 갓도 없는 욕심, 욕심이 욕심을 낳고 욕심 때문에 결국 그림은 엉망이 되고 만다. 이게 보통 인간들의 실제 모습이다.

다만 욕심과 욕심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도 타인과 그 욕심의 부스러기라도 나누려는 착한 마음은 귀중하다. 인간을 사랑하 는 신(神)이 계시다면, 아마도 그런 측은지심을 보시고, 최소한 연민의 은총을 내리실 거라 나는 믿는다. 고.이옥자씨의 명복 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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