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철 회고록 1] “머리카락 파세요! ” 한국의 가발 산업은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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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뷰티서플라이업계, 재미한인들이 주요 공급업자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헤어 업계 원로 정진철 사장이 앞으로 수회에 걸쳐 ‘가발 & 헤어업계’의 지나온 발자취를 회고한다.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 독자 여러분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관심 가져 주시고, 전시장의 회고 외에도 추가로 더 기록해 두어야할 사건, 정보 그리고 사진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면 언제든 제공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뷰티타임즈 편집자.주)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녀면서 “머리카락 파세요!” 외쳤다.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잘랐고, 서울 가서 공부하는 아들놈 때문에 잘랐다.

1960년 국민소득이 겨우 60-70달러 밖에 안된 가난했던 한국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수집되었던 머리카락은 간단한 손질을 거쳐 원모 그대로 해외 가발제조업체에게 수출되었다. 당시 한국 인구가 2천5백만(현재 5천1백만)이었으니, 남자와 아이들을 제외하면 성년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100퍼센트 수집한다고 해도 사실상 많지 않았었으며, 원모 상태였기 때문에 부가가치도 전혀없어 수출수익성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머리카락 원모만을 수출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가발제조산업시대가 열린다. 1964년 서울통상(주)(최준규)이 시동을 걸었다. 동사의 최 사장은 머리카락을 가발로 만들어 수출해야 부가가치가 2-3배 추가되 더 큰 수출고를 올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정부 당국에 건의 했고, 박정희 군사정부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당시 권력자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후원했다고 한다.

서울통상이 제조한 가발의 첫 해 수출액은 1만4천 달러 정도였다. 이는 가발제조업 붐을 조성시킨 계기가 되었고, 한독가발(조명흠), YH Trading(장용호), 다나무역(안인모), 반도상사(구자승) 등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제조업에 뛰어들었으며, 이들이 한국의 가발제조업계를 명실공히 이끌게 된다.

이 가운데 YH Trading(장용호)의 등장이 이채롭다. 장용호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1962년 설립한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뉴욕지점의 부관장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코트라의 주요임무는 한국에서도 제조하여 수출이 가능한 제품에 대한 시장조사였다. 주로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 수출되는 상품들의 견본을 구입해 한국 본사로 보냈고, 한국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태서 신상품을 만들어 내면, 코트라 해외지사요원들은 그 신상품을 가지고 해외시장을 개척했던 것이다. “

“당시 장용호의 눈에 띄었던 상품이 한국산 돼지털과 인모였다. 한국의 돼지털은 부드러워 브러쉬 제조 원자재로 인기가 있었고, 한국산 인모는 상류층 귀부인들이 애용하는 가발 원자재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다.” 장용호는 인모수입업자를 통해 뉴욕 브루클린의 유태인 가발제조업체을 알아냈고, 사장을 설득해 가발제조과정을 견학할 수 있었다. “공원들이 바늘로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캡에다 뜨는 작업을 보면서, 장용호는 ‘저런 수공업이라면 임금이 싸고 손재주가 좋은 한국인들이 더 잘할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장용호는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와와 KOTRA를 퇴직한 후 1965년 7월 서울 답십리에 콩나물을 키우던 반지하 40평짜리 움집을 빌려 가발공장을 차렸다. 공원 30명으로 시작한 공장은 염색과정에서 한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첫해 2만달러어치 인모가발을 수출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15만달러로 늘었다. (70대들은 YH Trading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정의당 전 대표였던 심상정이 위장취업하여, 임금투쟁을 벌이다가 경찰의 체류탄 과잉저지로 공원들이 쫒겨 다니다 건물 상층에서 뛰어내려 여러명이 사망했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YH사건’이다.)

가발제조업의 붐은 이렇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근로자 시간당 임금이 20센트였으니, 노동집약적 사업으로 딱 알맞는 사업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 근로자는 시간당 58센트였음). 가발제조업체들이 계속 수도 없이 늘어나면서 <한국가발업체수출조합>이 생겼고, 이 조합은 1970년 초반까지도 한국무역업체조직 가운데 최대 단체였다. 머리카락 값도 덩달아 올랐다. 1964년에 3.75㎏(1관)당 7천~8천 원 하던 머리카락이 1965년에는 3만~4만원으로 치솟았다. (당시 생산직 근로자 월급이 5천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방물장수, 엿장수가 동네방네를 돌면서 비녀 꽂은 어머니의 애지중지한 머리카락을 흥정 끝에 잘라냈다. 모발 수집상들은 미용기술 있는 아가씨들을 대동해서 농촌에 가서 서울의 멋쟁이 아가씨들은 최신유행인 파머를 해서 멋을 부린다고 꾀어 머리를 자르게 하고 파머를 해주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시골 아낙들은 돈 벌어 좋고 최신유행 파머를 공짜로 해서 좋았다. 사탕발림으로 여자 어린이를 유혹해 머리카락을 잘라가는 도둑도 활개를 쳤다. 심지어 ‘머리 기르기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정책건의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온 나라가 가발수출 열풍에 휩싸였다.”

그런데 한국의 가발산업을 더욱 폭발적으로 급성장시킨 일이 벌어졌다. 일본 가네가사가 개발한 인조모 <가네가롱>의 등장이다.

여기서 필자의 가족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65년 당시 필자의 장형(정진호)이 서울세관에 근무하고 계셨다. 필자보다 14살 위 연세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분이다. 6.25 전쟁으로 이북으로 피랍되신 부친(영문학자)을 대신하여 나의 모친과 형제 8식구를 돌보셨고, 나도 그 형님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나의 장형과 ‘가네가롱’의 만남은 세관에서 일어났다. 통관과정에서 형님은 ‘가네가롱’이 뭐하는 데 사용하는가 물었고, 그게 당시 한참 붐이 일기 시작한 가발제조에 필요한 인조모 원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 통관된 가네가롱은 70여박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품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네가롱’ 인조 원사로 가발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자주 끊어지는 등 여러 하자가 생겨, 크레임을 당했고, 일본으로 리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의 장형은 이런 수입과 리턴 과정을 처리하면서 가발제조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가발제조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형님은 리턴 예정이었던 ‘가네가롱’ 원사 30박스를 가네가사로부터 건네 받을 수 있었고, 그 원사를 대학동기(연희전문) 친구가 운영하는 동국무역(의료제조업체)에 의뢰, 가발제조를 맡겨보았다.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한 형님은 세관을 그만두고 가발제조업체을 하기로 결심한다. 세관 공무원 월급으로는 8식구를 도저희 먹여살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형님은 부친께서 일본사람들에게서 물려받은 적산가옥을 담보로 은행융자를 얻어 마장동에 25대의 미싱을 구입, 1965년 탄생시킨게 ‘미방무역’이다.

그런데 형님에게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가네가롱’ 원사의 질이 개선되었고, 가발제조 원사로서 획기적인 제품이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가네가사와 가발협회간 공급원칙이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선 5대업체 (서울통상, YH Trading, 다나무역, 한독가발, 반동상사)에게만 공급을 한정한다는 원칙을 협회측에서 내세웠다.

그러자, 가네가사가 형님 회사 미방무역을 예외적으로 추가해달라는 특별 조건을 붙였던 것이다. 협회는 이를 반대했다. 미방무역은 가발제조경험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가네가사는 “미방의 정진호 사장이 가네가롱 원사를 무사통관 시켜준 장본인이라는 것과 품질 개선후 2차로 선적된 가네가 원사를 무사통관시켜준 일, 그리고 일본말을 일본인 못지 않게 유창하게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결국 협회는 이를 받아들여, 미방을 포함한 6개업체만이 카네가 인조 원사를 공급 받는 것으로 결정된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 취직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형께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다. 외국 바이어 응대, 공원 모집…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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