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철 회고록 2] “79년 Royal Trading Co.를 창립하고 가발사업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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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14살 위이신 형님의 말씀은 천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대 영문과 3년 차 학업 중이던 나는 형님의 사업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최고의 직업이었던 은행원의 꿈을 접고 형님의 부름에 따르기로 했다.

형님이 시작하신 가발사업체 미방무역의 최대 고민은 해외 바이어들의 크레임을 해결하는 문제였다. 당시 가발제품은 Spandex를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요즘 가발과는 달리 엉성하고, 불량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불량품 때문에 전체 상품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크레임이 발생하면 해외 바이어들이 직접 서울에 들어왔고, 형님의 가장 큰 고민은 이들을 대하는 문제였다. 일본어는 유창하게 구사하셨지만, 영어는 전혀 못 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국에서 바이어가 왔는데, 형님이 통역이 필요하다며 나를 긴급히 부르시는 것이었다. 영문과 학생이니 영어를 잘하는 줄로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나는 영어회화를 배운 적도,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기에, 정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대면했던 바이어는 인디애나에서 온 Summit Lab사 Henry 부사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형님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Henry가 문제점을 제기했다. 나는 한 마디도 그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Henry가 얘기를 마치면서 “Do you follow me?”하는 것이었다. 나는 follow me란 말을 순간적으로 캐치하고 “형님, 일어나시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군요” 하면서 자리에 일어서면서 형님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Henry가 그대로 앉아서,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 알아들었냐?”는 말을 “따라오라”로 내가 알아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형님 앞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한 것이다.

이런 일을 자주 겪으면서 나는 가발사업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고, 공장 일에서부터 해외 마케팅 일까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공장을 가동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여공들을 모집하는 일, 수백 명에서 천여 명이 넘는 여공들은 기숙사에 기거케 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일…. 힘들고 어려운 일들뿐이었다. 콩나물국과 김치에 보리밥 세끼를 먹이고, 샤워도 매월 1회 정도 제공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일했던 누이들의 가련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당시 우리 회사 미방무역을 비롯한 6대 가발업체는 해외에 지점을 두고 상품 수주 및 바이어 관리에 주력했다. 미방무역도 뉴욕, Los Angeles, 브라질(상파울루)에 지점을 설치하고 지점장 1인씩을 파견하거나 현지인을 고용했다. 한국 정부는 1지점에 1지점당 1여권으로 한정했고, 2년마다 지점장을 교체할 수가 있었다.

해외 유명 Buyer 사들은 Los Angeles지역에 Brentwood Ind, Rene of Paris, Paris Fashion, 등이 있었고,

New York 지역에 Eva Gabor Ind, Valmore, Daejin Wig, K-Mart, Sears Roebuck, Consolidate Millinery, NU Look Fashion,

Texas 지역에 Helen of Troy 등 많은 Jewish(유태인) 수입업체가 있었다.

영국의 Hair Raiser, 독일의 Muller Company, 프랑스 파리(Paris)의 Camaflex Co, 그리고 Spain, Belgium 등에도 수입상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K-Mart나 Sears Roebuck 같은 백화점에 가발(Wig)코너가 따로 있어서, End-User(소비자), Consumer에게 직접 팔았다.

K-Mart, Sears Roebuck 회사에서는 purchasing Dept.가 직접 한국 가발회사(공장)에 Order를 해서, 수입해서 Distributor 했다.

지금부터 50년 전, 1971년 나의 첫 해외 출장은 영국이었다. Heathrow Airport(공항)에 도착하니, “남한에서 왔는가, 북한에서 왔는가?” 물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해외공관은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Cumberland Hotel에 묵으며 양고기란 걸 생전 처음 먹어봤고, 독일에서 만난 바이어를 통해서 나는 공산국가인 소련과는 Barter 무역으로 가발을 공급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풍차를 구경하면서 바이어 상담을 했고, 벨기에를 거쳐 귀국했다. 해외 바이어들과의 교감을 트면서 나는 점차 가발 분야 해외 마케팅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1972년 갑자기 외화 도피 혐의로 회사에 세무사찰이 나온 것이다. 알고 보니, 미방의 뉴욕지점장의 장난이었다. 연유인즉, 우리 회사 임기 만료 2년이 지난 뉴욕지사장이 귀국을 미루며, 현지에 남아 자기 사업을 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그가 귀국해야 회사는 새 지점장을 내보낼 수 있었으니, 형님은 애가 타셨다. 그런 와중에 회사는 지점장 월급 지급을 중단하게 되었고, 화가 난 그 지점장이 우리 회사를 청와대에 무고(誣告)한 것이다. 바이어로부터 외상대금을 받아 현지에서 챙겼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Daejin Trading 같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수입상에게는 특별히 외상으로 상품을 공급해주고 돈은 나중에 갚는 조건이었는데, 그들이 외상값을 갚지 않은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이 상황을 지점장이 악용한 것이다. 또한, 세무사찰 과정에서 노임착취를 했다는 정황도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당시 흔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 공원이 7백 명인데, 장부에는 1천 명이라고 보고하고, 300명분 노임을 사장이 사적으로 가로채는 일들이 업계에서는 있었다. 미방에서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당시 세무사찰이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씩이었다. 결국, 권력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우리도 모씨의 도움을 받아 청와대에 선을 댔고, 청와대에서 나온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회로 삼았다. 결국, 벌금 2억을 내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형님은 이런 일을 당하시면서, 심신이 지쳤고, 아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일본 가네가사 뉴욕지사를 통해서 회사 폐쇄 여부를 묻게 되었다. 가네가사는 크레임이 너무 많아 닫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문을 닫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국은 당시에도 퇴직금 제도가 있어, 문을 닫으며 마지막까지 이를 해결해야 했다. 나머지 가족이 회사를 맡아 운영하면서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그게 5년이 걸렸고, 1965년 창립된 미방무역은 1977년 막을 내렸다.

미방무역(Mibang Trading Co.) 상무를 마지막으로 실업자가 된 나는 마켓(Market)이 가장 큰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당시 작은 형님(1934년생)이 미국 시민권자로(1954년 유학생으로 도미) 의사직업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형님 초청으로 나는 4개월 만에 영주권을 받고 1978년 4월 미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다시 가발업계에 발을 들여놓을 줄은 상상 밖이었다.

L.A. 소재 가발수입상 C&H Co.(서정배 사장)으로 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나는 한국을 떠날 때 가발과는 거리가 먼 Album, Light Bulb, Fashion Jewelry 같은 Business를 해보려고 준비했었고, 미국에 와서 몇 달씩 간 이 품목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에 우연히 L.A에 나와 있었던 KEB(외환은행) L.A 독립법인 CKB(California Korea Bank) 홍성목 행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CKB에서 Credit Line으로 빌려준 Loan업체(가발수입상 및 도매업체) Lee Hair Goods사로부터(L.A 소재) 약 20여만 불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압류해 둔 가발상품의 가치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유행이 지나고 쓸모없는 제품들이었지만, 판매는 시도해볼 수 있다는 답을 했더니, 그 재고 품목을 나에게 넘겨줄 터이니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해보기로 하고 1979년에 Royal Trading Co.를 창립, 가발사업에 뛰어들었다.

충분한 자본이 없던 나는 Lee Hair Goods사 가발제품을 외환은행 현지법인 CKB로부터 인수하여 팔아서 갚으면서, 한국의 미성상사(당시 이봉상 사장), 보양산업(강창호 사장)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가발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장인어른께서 기꺼이 제공해 주신 주택 담보가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1980년 9월에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Royal Imex Inc.로 명명했다. 그 당시 한국인 가발 수업업체들 다수가 미국에서 이미 영업을 하고 있었다.

뉴욕지역에 Oradell Int’L사(박찬식 사장), Daily Fashion 사(박지원 사장), Boyang Trading사 (구영범 사장), Easko Trade사 (곽운영 사장), Amerkor 상사(정문량 사장), Sun Taiyang 사(박재오 사장), Rokman사 (이동재 사장), Junee 상사(이준행 사장), Roma Lee(이흥재 사장), 그리고 Chicago 지역에 Chade Trading(김종구 사장), Alicia (박영복 사장), Fashion World(홍세흠 사장)

Log Angeles지역에 His & Her Hair goods사(정용봉 사장), Lee Hair Goods(이 OO사장)(공급업체: 인왕실업), C&H Trading(서정배 사장), Century Fashion(최명광 사장), Westbay Import(이용규 사장), Laxan Trading사 (한OO 사장)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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