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철 회고록 3] “위빙용 휴먼헤어 장사로 적자 회사를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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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Royal Imex사를 창립, 미국에서 나의 가발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Lee Hair Goods사에서 인수받은 가발제품을 판매하면서, 한편 한국 공장에서 수입도 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갈수록 적자가 늘어났다. 사업 시작후 2년반 동안 당시로서는 큰 돈인 19만불까지 적자를 보았다. 이를 지켜본 회계사가 회사의 지분 50%을 팔아, 당장 20만불을 채워 넣어야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놓았다. 그런데 망해가는 회사에 누가 20만불을 투자하겠는가?

1980년대 초 당시 재미 한인 헤어수입도매상들은 Freedom Curl, Afro Curl 같은 흑인용 가발을 주로 판매할 때였다. 오늘날과 같은 망사를 사용한 Capless 가발이 아니라. Spandex 고무캡에 재봉틀로 박아 넣은 산발 머리 스타일의 가발상품이 주종이었던 것이다. 수입가는 2-3불 정도로, 아무리 팔아도 직원들 봉급, 마케팅 경비 등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달러 이자를 주고, 5만불도 빌리고, 3만불도 빌리고 회사 목숨을 연명해 갔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그런데 사람살이 죽으란 법은 없다. Royal사의 고객이기도 했던 뉴욕의 JK Wigs라는 한인 소매상이 위비용 휴먼헤어 장사를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휴먼헤어를 어디서 구입하는가 알아보았더니 한국의 ‘인춘상사’라는 회사에서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인춘상사를 접촉했고, 독점계약과 함께 수입&판매를 시작했다. 인모 판매가 급증했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제조 공장이 더 필요했고, 사업은 급성장했으며, 적자를 완전히 메꾸도 남았다.

Royal Imex 전용 공장, 미화가발(주)(최재목 사장)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독점계약과 함께 내가 오더를 책임졌고, 독점수입계약 하에 사업은 번창했다. 이를 본 나의 고교후배이자 시카고대학 출신인 홍영식씨가 자기도 이 사업을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Korea Loi사가 설립되었고, 우리 Royal사는 2개의 휴먼헤어 독점공급공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우리회사로 공급되는 모든 헤어제품의 인스펙터로 지명되어 일하고 있던 나의 큰 처남(유충현)이 자기도 헤어공장을 해보겠다고 해서 대보가발(주)를 설립, 휴먼헤어를 제작해 Royal에 공급했다. 독점회사가 3개가 된 것이다. 그 정도로 Royal Imex사는 미국 휴먼헤어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휴먼헤어제품 시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재미한인헤어수입도매업체들도 휴먼헤어 수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국의 최대 가발제조회사 미성(주)과 보양(주)도 휴먼헤어 제작에 들어갔고, 이밖에 한신(최봉엽사장), 다나(김창렬사장), 기신(장용길사장), 민창(김용식사장) 같은 휴먼헤어제조 회사들이 한국에서 설립되었다.

한중수교(1992년) 이전이었기 때문에 당시는 휴먼헤어제품 제작용 원모가 홍콩을 통해서 삼각무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수입되었다. 홍콩의 원모 최대 거래상은 CK(사장 CK Chao)가발사였다. CK는 브레이드, 가발 및 기타 헤어 제품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나와 CK 사장은 내가 한국의 미방무역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다. 미방무역과도 거래가 있었고, 미국에서 내가 헤어사업을 시작하면서 그와 상거래를 다시 텄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산동성에서 가장 큰 원모수집상이란 걸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CK가 주요 원모 공급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한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노동자 임금이 월500불까지 치솟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40불이었다. 나는 중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홍콩의 Dargon Proof Limted 사장 Raymond Gwan을 알고 있었는데, 키친외어 장사를 하던 그가 나에게 위빙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5000여개의 오더를 주었다. 그런데 제품을 받아보니 도저히 판매할 수 없는 불량품이었다. 크레임을 걸었지만, 당시 중국사람들은 크레임이란 것이 뭔지도 몰랐고, 반품도 할 수 없어, 결국 개당 $5에 수입한 상품을 50센트에 판매하고 말았다. Gwan사장이 여기 저기 중국의 형편없는 공장에 하청을 주어 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1980년대 말경부터 본격적으로 재미 한인수입상들 간의 휴먼헤어 장사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의 고교 후배 박영복 사장(작고, Alicia/시카고)과 이흥재 사장(Roma Lee/뉴욕)이 Royal의 바잉파워를 이용하여 상품을 좀 더 저렴하게 구매하는 방안으로 공동구매 회사를 하나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되면 Royal도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게 되니 서로가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즉시 그렇게 하기로 하고 3개 회사명의 이니셜을 하나씩 붙여 ARR America Company사를 설립했다. 우리는 위빙제품을 비롯하여 브레이드 등 기본헤어제품을 미성, 보양을 비롯하여 여러 공장들로부터 공동구입했다. 그런데 회사 창립 5년만에 Alicia의 박영복 사장이 애석하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해산하고 말았다. 당시 우리 헤어업계에서는 ARR America를 모두가 부러워했었다. “중앙고등학교 선후배는 어쩌면 그렇게 끈끈하게 연대하며 상호 도울 수 있는가?” 그랬다.

우리 세 사람은 1991년 처음으로 중국을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CK Chao가 자기가 위빙용 휴먼헤어상품을 중국에서 더욱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을 주선 해주겠는 제의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국에 헤어제조공장 다운 공장이 Rebeca(定州市)와 Yuzhou Shenlong Hair(허난성 宇宙市) 두 군데만 있었다. 우리는 Yuzhou 공장에 오더를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500여명의 공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방문하던 날,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 그리고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모여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마이크 들이대며 소감을 묻기도 했다. 당시 그들로서는 우리가 준 상품 오더가 엄청났던 것이다. 그게 한.중수교 바로 1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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