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K가 마지막 사고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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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건물 빌려서 살다보면 이런 갑작스런 일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불찰이긴 해도 왠지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서럽기도 하고 속이 많이 상했다. 이런 저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내 건물 마련이 급선무이다. 다소 힘들겠지만 셋방살이를 청산하려면 스토어 건물을 구입하면 임대료보다 건물 모기지가 훨씬 싸서 이득이란 걸 알았다. 우리도 내친김에 큰 맘 먹고 건물구입을 위해 은행 문들 두들겨보았다. 은행에서는 건물 값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내장 수리비도 빌려주겠다며 염려 말라고 했다. 몇 차례의 가격 딜이 오고 가다가 서로가 윈윈하는 가격으로 정했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막상 건물 내부를 보고 놀랐다. 이것은 건물이라기보다는 시체 말로 벽돌로 지은 사과상자였다. 전기시설, 히팅. 에어컨디션도 없는 건물이었다. 그야말로 골조와 겉벽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계약을 마치고 전 스토어에 있는 물건부터 새 건물바닥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사를 하면서 혹여 전 가게 건물주가 딴지를 걸가봐 스토어 안팎을 원래의 모습대로 고치고 손질을 하고 깨끗이 청소한 후 비디오로 찍어두었다.
 옮겨진 물건은 천막으로 덮고 지붕 공사부터 시작했다. 천장, 전기 시설, 히팅과 에어컨디션, 벽과 바닥까지 마무리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바닥은 얼마나 오일 때가 끼었던지 뜨거운 물로 벗겨 낸 후에 타일을 깔았다. 이렇게 해서 뼈대 골조만 있던 건물을 새 건물로 만들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뷰티타임즈와 뷰티엑스포도 함께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3개월이 지나도 전 건물주가 $5000을 돌려주지 않아서 연락을 했더니 너무 지저분하게 하고 떠나서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럴 줄 알고 비디오 촬영을 해 두었다고 했더니 그제야 전액을 돌려주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 번도 건물 매입 서류에 사인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가져보는 내 건물 서류에 사인을 하고 내 건물에서 비즈니스를 한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건물주의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을 했다. 그런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뷰티타임즈가 10년간 세들어 살았던 건물주가 소송을 걸어 왔다. 사무실을 비운 것에 대한 보복이련가? 이유가 어이없었다. “각 문에 손잡이가 없다. 바닥 카펫트가 들고 일어났으며 군데군데 찢어졌다. 이사하면서 복도나 엘리베이터의 바닥과 벽에 자국을 남겼다” 등등으로 소송을 걸어 왔다. 처음 그 건물에 들어 갈 때 3개월분 렌트비를 선불로 낸 것을 돌려 달라고 했을 때도 전 주인이 건물을 포기하여 경매에서 구매한 건물이라 아무 서류가 없다고 해서 선불 돌려받기를 포기 했는데 뒷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건물 주인을 찾아가서 ‘문손잡이는 원래 없었고, 바닥 카펫트는 우리가 손수 깔았으며, 이사할 적에 담요를 사용하여 자국을 절대 만들지 않았다’고 항의를 하여도 증거물을 대란다. 역시 건물주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증거물이 남아 있지 않았고, 또 이사 전의 상황을 비디오로 찍어 두지 않고 조심하는 것만으로 믿은 것이 불찰이었다. 법정으로 가는 수밖에…우리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K가 스스로 변론했다. 직원들은 증인석에서 K가 묻는 질문에 답을 했다. 우리의 답을 듣고 판사가 정상참작을 해서 결론을 맺어 주기를 유도했다. 소송한 금액보다 10분의 1로 떨어진 금액으로 판결은 났지만 속이 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억울한 학비를 내고 있지만 미국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다. 새로운 장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갈 때 K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플로리다에 있는 백인 가발 회사에서 메일링 카다로그와 인터넷을 통한 백인 가발 사업을 해 보라고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나와 아이들은 두말 할 것 없이 ‘NO’였다. K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듯했다. 마침 둘째 딸아이의 대학 졸업이 코앞에 있었다. 아마도 K는 둘째아이를 데리고 그 사업을 해 보려는 눈치였다. 아이도 펄쩍 뛰면서 다른 도시로 갈 것이라고 우겼지만 아빠의 그물망에 걸린 힘없는 물고기 일뿐이었다. 마지못해 아이는 1년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허락을 했다.
아이는 졸업을 하자마자 플로리다에 있는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서 일을 배웠다. 매주 이 메일로 보고를 해왔다. 사회 초년생인 23살짜리 치고는 야무지게 일을 잘 배우고 있는 듯했다. 아이가 그곳에서 일을 다 배우고 나면 회사를 옮겨 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그 회사가 옮겨 올만한 장소를 마련해야 했다. ‘웨어 하우스는 이런 사이즈라야 하고, 몇 부서를 나누어 채용할 직원들이 근무할 사무실 스페이스가 충분해야 하며, delivery 트럭이 물건을 주고받을 덱이 있어야한다’라고 했다. 그런 조건에 맞춘 건물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달이 다 되어 갈 때 아이가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물어왔다. “아빠, 아직도 안 늦었어요. 우선 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 집 사정과 미국인 직원들을 채용해서 일을 시켜야하는데 가능하시겠어요?” 라고 물었다. 아이도 우리가 걱정스러워 매일 되묻곤 했다. K는 은근히 아이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설마 지가 옮겨다 놓고 회사를 그만 두겠냐’는 거다. 그것은 미국서 자란 아이들을 부모 세대가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도 완강하게 만류했으나 K는 ‘이것이 내 마지막 사업으로 한 번 더 도전 해 보겠다’며 온 가족을 울리고 말았다.
시간은 자꾸만 지나가고 건물 마련이 쉽지 않은데 아이는 재촉을 해서 정말 난감하였다. 인연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만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한 건물을 찾아냈다. 크기도 우리가 원하는 사이즈이고 무엇보다 내부시설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시스템이 이미 다 되어 있어서 손 볼 곳이 없는 건물이었다. 은행의 허락을 받고 올인을 하는 수밖에…한 달의 인턴 과정을 마치고 아이가 돌아 왔다. 광고를 내서 직원 채용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매일 직원 채용 인터뷰를 하더니 부서를 만들고 모든 시스템을 들여오면서 나름 분주하더니 정식으로 법적회사 “Beauty Trends Inc” 사를 가동 시켰다.
플로리다 본사에서 매일 트럭으로 실어 오는 물건을 받아 창고에 정리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전 직원이 합심하여 잘 해결 해 나갔다. 본의 아니게 뷰티타임즈와 뷰티 엑스포도 함께 새 건물로 이사를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끔은 한국식 사고방식인 아빠와 미국서 자란 현대식 사고방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부녀가 격렬하게 다투기도 하였다. 그러면 아이는 온종일 속이 상해 울기도하고 짜증을 부렸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매일 긴장이 고조되는 중에도 아이는 잘 헤쳐 나갔다. 모델회사에서 멋진 미국인 모델들을 데려다 사진을 찍어 카다로그를 만들어 내고, 신제품을 개발해 내면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1년을 견디더니 약속대로 떠나겠다고 통보를 했다. 나는 ‘이제 막 무르익어가는 사업을 망칠테야’며 달랬다. 조금만 더 봐 달라고 사정을 해서 1년을 더 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매일 달래고 설레며 아이의 마음을 잡으려 노력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 될 때 아이는 2년간의 약속을 마치고 하루도 에누리 없이 뉴욕으로 가버렸다. 처음에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지만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더니 미미하지만 8년 동안 이작저작 굴렁쇠처럼 잘 굴러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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