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 1983년 아프리카에 공장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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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프리카에 소규모 가발 제조공장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미국 뉴욕 등지에서 보따리상들이 브레이드 등 헤어피스 제품을 소규모로 사다가 팔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우리 미성상사 제품을 주로 수입해서 판매했던 A회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회사의 P사장이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 회사 미성에 아프리카 진출을 제안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정치와 경제적 여건이 비교적 안정된 세네갈에 현지 가발공장을 짓기로 이미 허가도 받아놓았다는 것, 공장부지 및 설계도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 또한 공장을 신축할 자재도 이미 미국에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깊이 나누는 과정에서 세네갈에 3개의 업체가 진출하기로 되어 있고, 거의 동시에 허가가 나온 상태란 것도 또한 알게 되었다. 그중 1곳은 세네갈에서 이미 문구류 생산업체이며 자금력이나 규모가 상당히 큰 회사였다. 이들은 레바논 사람들이었다. 다른 한곳은 선태양사였다. 한국에 가발공장도 갖고 있어 사주가 가발생산 경험이 풍부했고, 뉴욕에서 수입/도매업을 상당한 규모로 하고 있었으며, 이미 아프라카 보따리상인들에게까지 상당량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곳은 지금의 Nina Africa였다. 당시 이 공장을 하겠다고 허가 받은 분은 시카고에서 가발도매를 하고 있었고, 또 한 분의 동업자가 있었는데, 동업자 P씨는 시카고 지역에서 가발소매점을 몇 군데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가발 제조 경험은 전무한 분들이었다.

경쟁을 하게 될 3개사를 비교해 보면, 레바논 사람들은 현지에서 이미 문구생산 공장 경험은 물론 자금력도 상당한 회사였고, 선태양은 가발제조 경험에서 베테랑이었음은 물론 자금력도 상당했었다. 이에 비해 Nina의 동업자 두 분은 가발제조 경험이 없어 경쟁력에서 자신을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자신들이 이미 투자한 금액도 있어, 자기들이 설립한 회사를 팔려고 물색하던 중 미성에 아프리카 진출을 제안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미성은 잘나가고 있었기에 그 분들로서는 미성에 어떤 도움을 주면 미성에서 제품 공급을 받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미성 사장님과의 끈끈한 정을 고려했던 것 같다.

사장님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회장님께 보고를 하셨다. 나도 그 사업계획서를 보게 되었다. 보완관계였겠지만 나는 미국의 P씨와의 협상과정도 늦게야 알게 되었고, 다른 직원 어느 누구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결정된 후에야 오픈되었고, 설명도 있었다. 나는 사업계획서를 처음 접하고, 부정적인 면이 좀 있음을 발견했다. 장래 시장성에서는 좋은 사업이라고 판단이 서지만 산술적 채산성 면에서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어쨌든 사업계획서가 채택되었다. 당시에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일본 원사업체에서 원사를 공급받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시장개척 차원으로 아시아권에 공급하는 원사가격보다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원사를 공급받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아프리카 시장에서는 제품의 질(Quality)은 그렇게 민감하지 않은 편이어서, 헤어피스의 경우 일본산 고급 재료에 비하여 1/3수준도 안 되는 한국산 PP원사로 브레이드를 만들어도 되는 시장이었다. 이런 요인들을 감안한 최종 결정은 당시 미성의 이봉상 사장께서 장래시장을 예측하고 내린 것이었다. 한편, 당시 아프리카 가발 및 브레이드 시장은 정상적으로 수입이 불가능했다. 특별소비세 같은 관세가 너무 비싸서 주로 뉴욕이나 파리시장에서 보따리로 사다가 팔곤 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진출 결정과 함께 한국에서 직원을 파견해야 할 일이 생겼다. 사장님 속마음에야 지명이 되어 있었겠지만 누가 가야 한다고 선뜻 말씀하시지는 않고 외부에서 언어가 가능한 비 생산전문가를 한 분 모셔서 매일 저녁 일과 끝, 저녁식사 후에 불어강의를 시작하였다. 강사는 현지공장이 준비가 완료되면 생산관리 책임자와 함께 아프리카 공장에 파견될 일원이었다.

직원들은 누가 아프리카에 파견이 될지 궁금해 했다. 특별히 본인이 가겠다고 하는 희망자는 없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에 나가 근무한다는 것이 당시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도 어려울 때였지만 아프리카를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검은 피부의 흑인들만이 주로 살고 있는 곳, 지도상으로 보아도 너무나 먼 아프리카였다. 쉽게 희망자가 나오기 어려웠다. 또 희망자가 설혹 나온다 해도 생산공장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당시에 관리경험이 있는 사람은 회사에서 두 사람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나 자신이 그곳에 나가 근무할 생각도 없었다. 회사에서도 그 당시 개발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내가 그곳에 파견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후 파견될 사람이 결정이 되었다. 1983년이었는데, 현재 미성 인도네시아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병철 사장이다. Nina Africa가 이렇게 탄생 되었다. 지금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가발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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