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을 떠나 해외진출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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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직 코리아나 회장 회고록 (8)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임기 후반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며 학생들이 거리를 누볐다. 노동조합들도 이에 편승, 노동운동을 펼치며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드디어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가 6.29 선언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면서 정치적 격동기를 맞았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혼란했고 노동운동 또한 걷잡을 수 없이 격해졌다. 근로자 임금이 1년에 40-50%씩 인상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 회사는 성숙해 가는 것 같았다. 이때부터 재계는 한국 내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은 계속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하게 된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동남아 등 해외로 사업터전을 이전하는 구상을 세운다. 미성도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게 된 이유였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인건비는 한 달 월급 30-40달러로 기억된다. 한국과는 10배 가까이 차이가 있으나 노동 생산성은 한국 근로자들의 50% 수준이었던 것 같다. 중국도 알아보고 검토해 봤으나 중국과는 수교도 하기 전이고 또 중국이란 나라는 이미 일본 기업들이 투자했다가 실패하여 대부분 철수한 경험이 있었다. 중국진출 타당성의 가장 큰 걸림돌은 중국인들 자신이 어느 정도 제조 기술과 과정을 익히고 나면 본인들이 직접 공장을 경영하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성이 인도네시아를 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미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업단지 토지를 구입, 공장을 짓게 된 해가 1990년으로 기억된다. 가발업체들이 이렇게라도 해외투자를 통해 공장을 이전하게 된 것은 다른 업종에 비해 자금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1997년 IMF를 겪으며 환율 급상승과 함께 인건비 역시 상당히 올랐지만, 100%를 해외에 수출하는 가발업계는 상대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근로자들의 인건비는 동남아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이 매우 높은 편이었다.

1991년 미성 상사는 베트남에 인모제품 공장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극비리에 직원을 파견했다.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교포와 교섭하여 일단 인모를 수집하는 일도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원모는 어느 정도 수집이 되었다. 나는 베트남 공장 설립을 최종 확정 짓기 위해 담당직원과 함께 베트남 출장을 가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비(非)수교국으로 한국에서 비자를 받을 수 없어 태국을 거쳤다. 신청 3일 만에 베트남항공편을 탑승할 수 있었다. 호치민시 국제공항에 착륙을 했다. 당시 공항 청사는 지붕은 슬레이드였고 벽도 없는 건물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책상 하나 놓고 입국심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통과하니 여고 학생들이 꽃다발로 환영해주었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집되었다는 인모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우선 확인부터 했다. 약 7~8톤 정도 될 것 같았다. 현지 수집과정도 확인했고, 정부 관료의 설명도 들었다. 호치민쪽 남쪽에서 수집할 수 있는 원모가 한 달에 어느 정도 가능할까 알아보니, 공장가동에 필요한 양의 기준에 형편없이 부족했다. 하노이 쪽이 원모수급이 더 쉬울 거라 하여 하노이로도 가서 알아보았다. 하이퐁이란 중국과의 국경지대인데 중국과 베트남과의 물물교환시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로 하이퐁으로 향해 달렸다. 2시간 정도 달렸을 것 같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산악의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당시 우리를 통역하는 사람은 북한의 김일성 대학에서 유학한 베트남인이었다. 기사에게 하이퐁까지 가는데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물었다. 3시간여를 더 가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하노이로 차를 돌리라고 하였다. 하노이 호텔까지 가려 해도 밤길에 2시간 넘어 3시간 가까이 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하노이로 돌아와서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출발키로 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지난 밤 갔던 곳까지 2시간여를 달렸다. 도로는 경사가 아주 심했다. 산의 중턱을 향해 가는데 부실한 비포장도로는 흙과 작은 자갈이 섞여 있었고, 창밖으로 내다보면 아찔했다. 정말 머리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나무가 없는 흙무덤 같았는데, 가끔씩 도로변에 큰 돌이 있었다. 그러한 돌이 그런 곳에서는 나올 수 없는 건데, 어떻게 저런 돌이 있는지 물었다. 그 돌은 산적들이 일부러 그곳에 두고 지나가는 차를 막아놓고 털어가는 용도란다. 도로 아래로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로 100여 미터 낭떠러지 산이었다. 정말 어제 저녁에 차를 돌려서 돌아간 것은 잘한 일이었구나 생각되었다. 하이퐁까지 가면서 정말 등골이 오싹오싹 했다. 이렇게 5시간 넘게 달려 하이퐁에 도착했다.

물물교환 시장을 가보았다. 중국과 국경에 인접한 곳이었다. 베트남의 하이퐁에서 육로로 중국으로 통할 수 있는 자동차 도로인데, 군부대가 나와서 초소경비를 하고 있었다. 도로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철조망으로 막혀있었고 초소근무자들이 경비를 하고 있었다. 초소의 바로 옆으로 큰 산을 넘으면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과 베트남 상인들이 상품을 들고 서로 오고 가며 물물교환을 해가곤 했다. 시장규모는 제법 컸다.

초소에 근무하는 군인들한테 물었다.
“상인들이 저렇게 산을 넘어서 다니는데 불법이지 않은가?”
“불법이지만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기 때문에 용인하고 있다”
“그러면 당신들은 초소 근무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초소의 근무자는 도로로 가는 길을 통제하고 경비하는 임무이지 도로가 아닌 산으로 왕래하는 것은 우리들의 통제 밖이다”
“이곳 시장에서 인모도 교환 하는가?”
“지금까지는 필요한 사람이 없어 구경을 못했다. 필요해서 찾으면 중국에서 가져올 수 있을 거다.”

베트남에서 인모공장을 할 만큼 원모수집 량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중국모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불법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굳이 중국 원모를 사용해야 한다면 중국에 이미 상당한 가발공장들이 가동 중에 있는데, 베트남에서 공장을 해야 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다시 호치민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수집해놓은 원모는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 처분하도록 지시했고, 베트남 공장 진출 플랜은 이로서 중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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