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X-Ray Grid 사업을 중단한 K, 계속해서 또 다른 일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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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다니러 갔다. 예전과는 다르게 환율 변동이 심하게 일고 있음을 느꼈다. 한국은 분명 변화가 오고 있었다. 방학을 잘 마치고 귀가했다. 왠지 기분이 좀 썰렁함을 느꼈다. 순간 나는 우리 집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창고를 빌려 쓰지 않고 아래층 큰 빈방을 창고로 사용해 왔는데 15여년 동안 내 손때가 묻은 grid 상품이 싹 치워지고 없었다.
 K는 변명 했다. “그 동안 X-Ray grid 팔아서 모든 일을 꾸려왔다. 하지만 당신 일이 너무 바쁘고 버거워 보여,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부에 사는 친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있었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일이다. 억장이 무너져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한국에 다녀 온 시차도 있었지만 나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몇 날을 잠만 잤다. 정신을 가다듬고 출근을 했다. 회사의 분위기도 달랐다. 미국으로 이주할 때 가져 왔던 곶감도 이제 밑바닥이 보이는데 매달 직원들의 월급과 사무실 렌트값, 프린트, 우편료를 어찌 다 감당할 것인가? 이제는 재정을 보충해 줄 방도가 없다. 한국으로 보낸 곶감을 더 이상 이곳으로 옮겨 올 수는 없는 일이고, 이제는 자급자족을 해야만 살아남을 것이다.
갈 곳은 은행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grid사업 덕분에 크레딧이 쌓여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신세를 질 수 있게 되었다. 국내외 뉴스는 온통 한국에 금융위기가 왔다고 떠들어댔다. 마음도 심란한데 고국의 금융위기까지…뷰티타임즈는 그런대로 매달 출간되고 있었다.
그 동안 뷰티 업계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케미칼 시장은 물론이고 헤어시장 성장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만큼 발전되었다. 이런 발전에 뷰티타임즈 역할도 작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뷰티타임즈 사무실을 흑인가로 옮겼을 때 다소 불안했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들과 이웃하여 서로를 알아가고 있어서인지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사람 사는 것이 별게 있으랴. 그렇게 해서 조용히 새로운 세상을 적응하면서 살아가는데 K는 또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주가톨릭평신도들의 모임에 자주 참가하고 있었던 그에게 동료들이 가톨릭 쇄신을 위한 신문을 만들자면서 그 일을 K가 주도해 주기를 바랬다. K는 마지못해 또 다른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쇄신운동이란 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가톨릭21>이란 신문은 3여년만에 가톨릭계에 충격만 주고 출간을 중지하고 말았다. <가톨릭21>을 폐간하면서 K는 <꽃씨뿌리는마음>이라는 또 다른 간행물을 만들어 냈다. 조그마한 사이즈의 단행본으로 독자들의 기고를 모아 만드는 교양지였다. 무엇이든 시작할 때는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늘 부딪히는 것은 돈이다. <꽃씨뿌리는 마음> 잡지도 오래가지 못하고 1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광고 후원을 받아 발행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K는 이런 저런 일로 바쁜가 싶더니, 갑자기 이북엘 다녀와야겠다며 준비를 했다. 시민권자도 아닌데 이북엘 어떻게 들어가며, 갔다가 못 나올지도 모르다며 직원들까지 걱정하며 말렸지만 K가 우리말을 들어 줄 리 만무했다. 말리는 것을 포기를 하고 그래도 떠나기 전에 전화선이라도 AT&T로 바꾸기로 했다. 평양에 있는 고려 호텔에도 AT&T를 사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매일 별일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돈 저돈 끌어 모아 조그마한 선물도 마련하여 K는 용감하게 떠났다. K에게서 첫 fax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마음 졸이며 밤잠까지 설쳐가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고서 Fax로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고,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돌아 왔다. 돌아온 K는 일절 말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북 상황을 브리핑 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묵묵 부담이었다. 이유는 잠시 겉모양만 보고 온 걸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편, K는 Trade Show를 구상하고 있었다. 우리 한인 사업가들을 단단히 묶어야 미국 땅에서 우리가 뷰티산업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산 공장과 도매, 소매상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면서 업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8개의 한인 도매업체들의 동의를 받아 Beauty Expo USA. Inc사를 창립했다. 대표이사는 K가 맡았다. 어설프긴 했지만 무리 없이 첫 쇼를 마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매업체들이 독자적인 쇼를 구상하면서 탈퇴했고, 2-3분이 남아 지금까지 연명해 오고 있다. 물론 K가 Beauty Expo사 대표이사를 맡고 있을 뿐 Beauty Times와는 별개의 회사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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