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렵고 힘든 잡지 발행,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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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일은 더 많아지고 출장이 더 잦아 졌다. 둘이서 출발 할 적마다 아이들 넷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한번 나가면 며칠 만에 귀가를 하곤 했는데 어른들도 없는 집에서 어린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뽀족한 대책은 없었다. 그래도 아무 문제없이 잘 자라 준 것은 큰 아이의 도움이 컸다. 본인도 어렸지만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나서 동생들을 잘 건사 해 주었고, 그에 잘 따라 준 아이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부모가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는지 투정한번 부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씩 바깥을 돌고 나면 일은 더 많이 밀려 있고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리드(x-ray grid) 수출량이 조금씩 늘어나 매거진을 만드는 일에 경제적으로 기본적인 도움은 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신문, 뷰티 타임즈의 수입이 지출비용을 따라 잡지를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케팅의 비중을 넓혀 보려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시동생(2)을 불렀다. 불려 온 시동생(2)도 형을 따라 동부 출장을 다녀오더니 출근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형의 사업이 미래성이 없는 불투명한 사업으로 보인다며 지금이라도 다른 사업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말만하고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런 시동생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뷰티타임즈가 창간되던 같은 시기에 헤어업계 신생회사들은 그 동안에 고속으로 성장하여 미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해 있는 반면, 뷰티 타임즈는 여전히 프린트 값과 우편료를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정말 승산도 없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며 부부간 의견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도 K는 ‘미국 속에 민족적인 산업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이 분야뿐인데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 희생을 본인이 한번 해 보고 싶다’며 나를 달랬다.

아옹다옹하는 가운데 뷰티 타임즈도 많은 변천을 겪었다. 처음 타블로이드판 신문형식이었을  때, 전자 글꼴이나 전문 편집기자도 없이 시작된 출판 시스템이 오죽하였을까. 고작 “아래ㅎ글판”으로 글자를 키우다 부족하면 프린트기에서 키우고 키우다 글자체가 희미해지면 검정 매직 팬으로 색칠을 해가면서 신문과 매거진을 만들어 냈고, 아트 마트에서 사이즈별 검정 비닐 줄을 사다 칸을 치고, 프린트하다 밀려나서 삐뚤 자뚤 우스운 꼴이 되기도 했다. 조금 더 발전 한 것이 문방사우 글꼴시스템이었다. 거금을 들여 문방사우 글 꼴을 설치하고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전면 칼라 샤인도의 매거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좀 더 화려해 보이고 돈벌이가 되어 보였는지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잡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분은 잡지를 다 만들어 놓고 전화를 해 왔다. “이보시게 K, 당신네 뷰티타임즈 내게 팔라오, 얼마나 주실건가요? 이만큼 주리다. 농담도 잘 하십니다” 이만큼이 얼마인지 독자들이 알면 기절할 것이다. 그런 대화를 하면서 그는 이미 프린트를 다 마쳤단다. 그저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잡지가 연거푸 나오고…밑 자본금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 트레이드 잡지인데 모두 대단들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열정을 스토어에 붓는다면 대박이 날 텐데 말이다. 광고비가 다 해결할 것처럼 보이지만 광고라는 것이 그렇다. 광고비를 꼬박꼬박 잘 내는 광고주가 절반이고, 한 두어달 밀려가다 사라진 광고주가 절반이었다. 책 무게도 그렇지만 해매다 상승하는 우편료는 정말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매달 프린트 값과 우편료만 마련되어도 반타작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우편료라도 마련해 보려고 독자들에게 구독료 청구도 해 보았고, 헤어 스타일잡지를 만들어 팔아 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헤어스타일 비디오를 만들어 팔아 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 동안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여 K가 경영대학원을 마친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면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한국에 설립해 둔(큰 시동생이 경영하고 있었음) 회사를 이끌어 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하루빨리 공부가 끝나고 한국으로 가기를 기다리는 가족의 바램과는 달리, 본인은 느긋해 보였다. 점점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아보였다. 나는 계획을 세워서 밀어붙이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K는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자꾸만 늦어진다고 변명을 하였기 때문에 일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무조건 한인 학생들이 없는 의대 도서관으로 데려 가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차를 가져와 버리고 도서관이 닫힐 때 데려오는 작전 폈다. 그래서 K는 겨우 5년 만에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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