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못하는 게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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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ray Grid, 신문과 뷰티타임즈 발행, 경리와 세금보고까지

직원이라야 고작 4명. 파트타임 미국인 1명과 기자 1명, 나 그리고 K와 좁은 사무실 공간에서 마감을 재촉하면서 늦은 밤까지 시름을 하다보면 머리에서 소리가 다 들렸다. 그렇게 매호 신문이 프린트 되어 나갈 적마다 왜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하나를 곱씹으면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냈다. 청소에서부터 그래픽, 취재, 번역, 편집, 구독자관리, ups로 보내야하는 그리드(grid) 페킹, 경리에서 북 키핑까지 전천후 직원이 되어 갔다. 신문이 어느 정도 손에 익숙해 질 때 그리드 사업까지 버거워서 한국에 사는 시동생(1)을 불러 일을 함께 해 보자고 달랬다. 6개월 정도 일을 도와주더니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한국으로 가 버렸다.

그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였고, 뼈 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나라였다. 시동생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나름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말리지 않았다. 그의 미래를 우리가 잡아 둘 수 없는 거니까. 인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남은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그 덕분에 사무실을 좀 더 큰 곳으로 옮겼다.

마침 유학을 마친 학생 1명이 직장을 구하러 왔다. 여러 조건이 맞아서 채용했다. 어느 날 미국인 여직원이 풀타임 잡이 필요하다며 직장을 옮겨 나갔다. 그녀가 하던 일은 경리와 세금 보고까지 영어 업무를 맡아서 했는데 그녀가 가버렸다. 우리는 미국 신문에다 광고를 내서 미국인 직원을 채용했다. 무슨 영문인지 2-3일이면 나가 버리곤 했다. 광고비만 자꾸 지출하게 되어 마지막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왜 오래 있지 못하느냐고… 한국 사람들이 웃으면 자기 흉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해서 그만 둔다는 것이었다. 아 차 싶었다. 그렇지. 외국인들과 함께 일할 땐 우리가 조심해야했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얼굴이 화끈했다. 이제는 한국 사람들만 있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던 K는 더 이상 광고 내서 사람을 찾지 말고 나더러 모든 것을 하라고 했다. 나는 배운 것도 아닌데 못한다고 손 사례를 저었다. 못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되지. K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가 너무 버거워 때로는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신문은 프린트 값도 감당을 못하고 그리드(grid) 팔아서 간신히 운영되는 회사, 직원을 늘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 사막에서 가져 온 밑 자본금을 곶감 빼 먹듯 야금야금 다 빼 먹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방법은 희미해져 가고 나마져 못하겠다고 하면 배를 굶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버티어 갔다.

그로부터 모든 업무는 내게 맡겨졌다. 몇 명 안 되는 직원들이지만 월급에서부터 세금보고, 4/4분기. 그리고 연말 세금보고까지, 물론 마무리는 회계사가 하겠지만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해야 했다. 연말이 왔다. 정보를 수집하여 전임자가 했던 것처럼 우편으로 세금보고를 내보냈다.

어느 날 팩스머신 앞에 길게 늘어진 종이들, 들여다보니 세금 보고 한 것들이 95퍼센트가 틀렸다고 되돌아 온 것이다. 친절한 미국사람들은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내가 알아보기 쉽게 틀린 곳 마다 줄을 긋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서 보내왔다. 나는 그 설명대로 다시 작성하여 보냈다. 덕분에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첫해는 95%가 틀렸지만 그 다음해에는 95%가 맞았다. 삼세판이라고 하더니 3년 만에 반 세무사가 되어 오랫동안 써 먹고 있다.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배우며 사는 모양이다. 마침 유학을 도중에 중단하고 한국으로 갔던 시동생이 가족을 데리고 왔다. 미시간 대학에 두고 갔던 학적을 세인트루이스대학으로 옮겨서 두 가족이 한집에서 오순도순 지내게 되었다. 시 동생이 아침에 학교를 다녀오면 K가 오후에 학교를 갔다. 시동생이 먼저 졸업을 하였다. 그 동안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동생 졸업은 내 어께의 무게를 덜어 주었다. 미국 생활이 생각보다 만만치는 않았다. X-ray grid 팔아서 회사 운영하고 두 가족이 쓰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친척 한사람 없는 외로운 미국 생활은 시동생 가족이 있어서 잠시나마 즐거웠는데 한국에 직장을 잡아 떠나게 되어 무척 섭섭하였다.

L.A. 폭동 그리고 뷰티타임즈 창간

우리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어느 날, 미국 TV에 연일 L.A. 폭동 뉴스가 비춰졌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도 폭동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심각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현장이 궁금해졌다. K가 .L.A,로 취재를 떠났다. 며칠 동안 취재를 다녀 온 K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뷰티 서플라이하는 한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뷰티 서플라이가 뭔지는 모르지만 많은 한인들이 스토어 주인이고, 주 고객이 흑인들이라는 거였다. 평소에 흑인고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해서 보복을 당 한 거라고 했다. K는 또 며칠을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계속 흑인 인구는 늘어 날 것이고 그렇다면 뷰티 산업이 날로 발전 되어 갈 것은 기정사실인데 교육이 좀 필요하다며 뷰티 업계에 필요한 정보지를 만들자고 했다.

여전히 나는 말리는 쪽이었고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K는 전혀 내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생소한 분야에다 우리가 가진 흑인이라는 고정관념이 마음에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K는 분주하게 뷰티산업에 선두를 달리는 많은 분들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서 타블로이드 신문형식으로 “뷰티 타임즈”라는 월간지를 출간시켰다. 신문 한가지만으로도 어려운데 나는 앞이 캄캄할 정도로 난감하였다. 그리드(X-RAY GRID) 팔아서 감당해야하는 일이 너무나 많고 직원도 더 충원을 해야하는데 아슬아슬한 나날을 보내면서 견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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