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드디어 미국에 정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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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행기를 타고 민둥산이 펼쳐진 사막을 지나, 중부 쪽으로 한참을 날아가는데 서서히 푸른 초원이 시야에 펼쳐지면서 우리 가족의 입에서는 점점 탄성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내릴 준비를 하라는 기내 방송을 들으며 상공에서 내려 다 보았다. 미국이 싫다며 앙탈을 부렸던 나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그때가 6월 초순이라 미주리주의 벌판은 예쁜 공주가 살 법한 궁전의 뜰악같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족은 미국 땅 한가운데, 이곳 세인트루이스시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선, 호텔에 여장을 풀고 우리가 와서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너무 많은 집을 보아서인지 헷갈려 고르기가 어려웠지만 그 중의 적당한 집을 골랐다. 변호사를 통하여 가계약을 해 두고 일본과 한국을 다녀서 사우디아라비아 집으로 돌아갔다. K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일을 정리 하려면 1년여 남짓 걸릴 테니 나와 아이들이 먼저 미국생활을 시작하라고 했다. 한 달여를 또 갈등 하다가 우리는 간단한 짐을 챙기고 용기를 내어 두 아이(5살, 10개월)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왔다.

가계약 상태이던 집을 계약하고 우리 집으로 만들었다. 이곳에 아는 사람은 단 한분이었다. 사우디아라비와 연관된 사업을 할 때 우리가 도움을 드렸던 분이었다. K는 킹사이즈 매트리스 1개, 전기밥솥 1개, 자동차 한 대를 사서 차고에 넣고 이 정도면 아이들과 살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나는 운전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 어찌 살라며 좀 더 있다가 가라고 매달렸지만 K는 바쁜 스케쥴 때문에 더 이상 미국에 지체하지 못하고 중동으로 떠나가 버렸다.

나의 미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 대신한다더니 나는 점점 씩씩한 엄마가 되어갔다. 우선 이 땅에 법적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E2 비자였다. 큰 아이를 학교에 입학 시키고 나도 영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타임지도 구독해서 습독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려면 언어가 문제였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 감정이야 통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미국을 모르니 용기가 절로 났다. 전 주인이 쓰다 두고 간 노란 광고 책을 뒤져서 운전학교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시원치는 않았지만 더듬더듬 영어로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필기시험을 먼저 보라고 했다. 필기시험에 만점을 맞았다. 시간 약속을 잡았다. 큰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10개월 된 아기를 이웃에 맡기고 하루 한 시간씩 운전 연습을 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시험관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서 3일을 배우고 시험을 쳤다. 물론 떨어졌지만 시험관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아냈다.

다시 2일 동안 배우고 합격 했다. 운전 면허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나에게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났다. 마음이 급했던 터라 운전면허증을 받아 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그러나 겁이 나서 길에 나서기가 무서웠다. 이웃에서 뱅글뱅글 연습을 하면서도 얼마나 용을 썼는지 어께도 아프고 목이 굳어 몸살까지 났다. 며칠을 끙끙 앓으면서 생각해 낸 것이 간담 키우기였다. 무작정 다니기가 막연해서 큰 아이의 학교 같은 반 학생들의 집 찾기를 시도 했다. 지도 한 장과 집 주소록을 가지고 길이 덜 복잡한 시간대에 지도에 줄을 그어가면서 집을 찾아 다녔다. 22명의 아이들 집을 다 찾고 나니 내 운전 실력도 좀 나아졌다. 이제는 좀 더 큰 곳으로 나가야지 하며 성당 교우들의 주소록을 들고 온 시내를 다 찾아 다녔다. 아주 외곽에 있는 집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찾고 나자 운전에 자신 감이 생겼다. 그렇게 집 찾기를 마치고 하이웨이 운전까지 자신 있게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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