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신혼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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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 사는 조카가 다녀갔다. 35년 해외생활에 친정가족으로서는 네번째 방문자였다. 물론 첫 번째 손님은 지난 해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결혼 18년 되는 해에 어머니께서 딸을 찾아오신 것이다. 도대체 뭘 하며 사는지 궁금 하다시던 어머니를 모셔다 두고 우리는 눈만 뜨면 온 가족이 다 밖에 나가고 없었다.

텅빈 집안에서 어머니는 집 안팎을 들락날락하시면서 동네 한 바퀴 걸어 다니시다가 미국 할머니들 만나면 뜻도 모를 인사법으로 손을 흔들어 주고 ‘할루할루~’하시면서 견디시더니, 겨우 10일 만에 돌아가시겠다고 성화를 부리셨다. “어머니, 그래도 처음으로 오신 딸집에 100일 정도는 계셔 주셔야 다른 가족들이 오고 싶어 할 것 아녜요”했더니, 생각을 좀 해 보시더니 그러시겠다고 하시고는 매일매일 달력에다 동그라미를 그리시다가 100일이 되는 날 떠나셨다.

아시아나 노선이 있는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잡은 손 놓기 싫으셨던 어머니는 잘도 참으시더니 눈물을 끝내 주르륵 흘리시면서 한 말씀하셨다. “잘 난 자식(은) 남의 자식이라더니 니가 그짝이구나. 내 그늘에는 못난 자식들만 모여 사니 말이다.” 그 이후에 막내 동생이 회사일로 라스베가스에 출장을 왔다가 여기까지 다녀갔고, 몇 년 뒤에 다른 동생네가 ‘초딩생’인 어린 조카 둘을 미국 구경시킨다고 보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서 보냈다.

시댁 식구들은 늘 릴레리식으로 다녀가거나 몇 년씩 머물다 가는데 비해 친정 식구들은 오히려 나더러 ‘이제 역이민하지 뭐 남의 나라에 그리 오래 살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미국에 오지 않더니 모처럼만에 조카가 다니러 왔다. 그것도 3일간의 여유를 가지고 와서 이모가 사는 모습을 보고 미련 없이 휑 가버렸다. 그 조카는 ‘지’ 아버지의 등살에 못 이겨 이모가 운영하고 있는 스토어를 맡아 해 볼까하고 와보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이다. 나는 궁금하여 국제 전화를 해서 물어 보았다. 부모에게 ‘살 곳이 못 되더라’라는 한마디만 전했다는 거다.

“그 바쁜 중에도 이모가 자주 한국에 나오시니 좋습니다.” 한국에 가면 조카들이 내게 하는 위로의 말이다. “미국에 사는 아줌마들은 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세요?” 잠시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나를 보고 돌아간 조카가 가족들에게 일러바친 후 친정식구들이 물어오는 질문이다. 형제가 많아 조카들도 많은 편인데 아직까지 미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조카나 형제가 없다. 미국에 대한 꿈이 없다는 거다. 나는 주저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며 산다.”고 말해 준다.

그렇다. 이민자들은 참으로 일을 많이 하고 산다. 이민자 아닌 사람들이 보면 일에 환장한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먼저 일어나 나는 새가 모이를 더 많이 쪼아 먹는다”고 했던가?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마치 일을 하기 위해 이민 온 사람들처럼 바삐 살아야 그나마 이민 온 것에 대해 후회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이민 온 일을 뒤돌아보면서 여기에도 한국에도 발을 딛지 못하고 결국에는 국제 미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는 그래야만 산다. 놀 것 다 놀고, 즐길 것 다 즐기다가는 집안 망신 개망신 다 당하게 되는 거다.

누구나 이상적인 아메리칸 드림을 마음속에 가득 담고 태평양을 건너올 때는 그렇게까지는 바삐 살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태평양 바람을 타고 미국에 왔으니 썩은 호박이라도 한번 찔러 보아야겠다는 각오로는 사는 거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기왕 미국에 왔으니 시시하게 살지 말고 화끈하게 살다가 가자’였다.

우리는 한국서 결혼을 하고 신혼을 시작한 곳이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오일 달러가 넘치는 중동특수(中東特需) 속에서 중동을 상대로 장사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외쳤던 70-80년대의 기수들, 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하는 무언의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한국 전쟁을 전후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만 살았던 그들은 ‘미국의 용병으로 팔려’ 월남 전쟁까지 끌려갔다. 그리고 월남의 고통도 잠시 잊은 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오일 달러를 주어 담으러 중동으로 몰려갔던 것이다.

우리 내외도 그 중의 일원이었다. 남편도 (이계송, 뷰티 타임즈 발행인, 이 글에서 K라 표기한다) 본인이 원했던 신문사 기자의 꿈을 접고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어 Y그룹 건설공사 마켓팅 담당자로 중동 지사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의 사막생활을 하고 돌아와 나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 시절엔 누구나 그러했듯이 우리도 신혼 방을 마련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결혼을 하자마자 함께 중동으로 나가야 했다. 중동지역에 가족을 데려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도 남편은 특별한 사람이었는지 나를 데려갔다.

가족 부양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했던 시절, 그나마 중동에 나가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였던지 한 사람의 출국자를 환송하기 위하여 수십명의 가족들이 김포 공항에 몰려갔다. 섭씨 40도가 넘는 열사의 나라로 돈 벌러 떠나는 사람이 애처롭고 미안하기도 했었기에 공항은 늘 이별의 슬픔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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