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에 부치는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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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을 바라보는 막내 동생은 술만 좀 마시면 내게 국제 전화를 한다. 누 나! 엄니 같은 우리 누나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니 같은 누나가 보고 잡아? 엄마가 보고 잡아? 라며 나 더러 어쩌란말이야! 라고 호통을 쳐 보지만 내 마음도 짠~해진다.
막내는 3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말도 다 배우지 못하여 자기표현도 제대로 못할 때이다. 어딜 가든 형들의 꽁무니만쫄래 쫄래 따라다니며 형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했다. 그 형들 위에 내가 서 있다.어머니는 농사일에 바쁘시고 아이들에게 별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다. 그도 그럴것이 시골 아낙이 뭘 얼마나 지식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콩 이야, 대추야라며 나무랄 수 있었겠는가? 그 저지 타고난 운명대로 잘 나든 못나든 살아서 굴러다니면 되는 거지. 그렇지만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등 어루만져 주면서 각자의 운명을 의지하고 자랐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마도 추석 끝머리 어느 날이었다.수업 중에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어느새 누가 덮었는지 거적으로 주검이 덮여져 있었고, 그 광경을 본 나는 숨이 꽉 막혀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도 슬픔의 눈물이 나지 않았다. 장례 날짜를 잡아 둔 며칠을 보내면서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면서도 나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곤 했다. 흡사 하늘로 가신 아버지를 향하여 무언의 원망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원망이란, 앞으로 아버지없이 어찌 살아갈 것 인가 라는 절망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눈물도 나지 않았다.장례식 날 에서야 어린 저의 눈에는 봇물이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앙앙~내가 울부 짖는것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진학이 어렵겠다는 절망감이 더나를 슬프게 하였던 것 같다. 어머니의 슬픔 은 땅까지 꺼져 버렸을 터인데 말이다. 철 없는 어린 아이의 욕심이 었겠지? 나는 주위를 돌아 볼 겨를도 없이 내가 바라는 것을 채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내가 원하는 목표점에 도달하였다. 그런 뒤에서야 아버지의 빈자리가 보이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빈자리에 연약한 여인이신 어머니께서 안간힘으로 버티고 서 계심도 알았다. 나는 딸 이지만 어린 세 남동생들이 있었다. 물론 이미 장성한 오빠들도 언니들도 여럿 있었다. 집안이 그리 가난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농가의 수입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아 형 편에 맞추어 학업이 끝날 때 까지 동생은 일을 하며 진학을 미루곤 하였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되었고, 그때서야 동생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진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동생도 또 막내 동생까지도…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서로의 등을 두들겨 격려하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서로 서로 채우면서 세상을 엮어왔다. 그렇게 좌절하지 않고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어머니의 강인한 모성이 우리들의 버팀목으로 서 계셨기 때문 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도 못하셨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다 그러 했겠다. 겨우 당신의 이름자를 종이에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그리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내가 지금까지 사는 동안 언제나 어머니는 의문이셨다. 어쩌면 배운 사람 못지않게 셈에도 밝으시고,추수가 끝나면 어떻게 차를 갈아 타시는지 신기할 정도로 자식들이 흩어져 사는 곳마다 가실 한 푸성 귀 보따리를 이어다 나르시곤 하셨다. 서울로 이사하시고도 아침이면 물 통을 짊어지고 약수터를 찾아 이 전동차 저 전동차를 갈아타시면서 물을 길러다 가족의 건강을 지키셨던 어머니.차곡차곡 전생의 업을 쌓듯이 어머니는 말없이 세월을 잘 견디어 내셨다. 우리의 결혼 18년 되던 해에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께서 이 미국 땅까지 긴긴 시간 비행기 타고 딸을 보러 오셨다. 공항 출구로 비쳐진 내 어머니의 모습은 이러하셨다.‘청포 물 고운 결 비녀로 쪽을 지우셨던 긴 머리는 어디로 가고 하이칼라 머리에는 어느새 하얀 눈송이로 단장을 하고 얼굴에는 살아 온 세월만큼 골이 패인 주름으로 가득 채우시고 여전히 곧으신 큰 키에 양장을 하시고 고무신 대신 하얀 가죽 단화 구두를 신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 이 낯설어 보였는데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 안내원 의 안내를 받고 출구로 나오시면서 연신 할로 할로 할로만 노래처럼 외치시던 어머니. 왜 할로 할로 하셨냐고 여쭈었더니 할로 할로에게 이리가면 내 딸한테 가는 길이냐고 물으면 할로 할로가 맞다고 머리를 끄덕여서 그 러셨다지요’ 그래서 우리아이들에게 어머니는 할로 외할머니가 되셨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학교에, 우리부부는 일터로 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긴 하루 시간을 온 동네를 휘휘 돌아 다니시면서 양코배기 이웃사람 만나면 무조건 할로 할로 하셨다 한다. 어느 날 우리 결혼기념일에 온 가족이 일식집에 모였는데 무슨 일로 입씨름이 생겼다. 한참을 듣고 계시던 어머니는 명 판결을 내려 주셨다. 아옹다옹도 서로의 관심사이며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이미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둘 다 잘 했으니 식사나 맛있게 하자 하셨다. 할로 할머니이신 어머니는 겨우 100일을 채우시고 심심한 미국이 싫고 재미있는 한국이 좋다면서 귀국 하셨다. 그리고… 어느새 허리가 굽어 낫 놓고 기억 자가 아니라 허리 굽어 기억 자가 되신 어머니가 되고 말았다.그래도 기 억 자 허리를 잘 이끄시고 동네 노인정에 매일 출근하시는 어 머니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살아만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머니.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헛것을 보고 대화를 하기 시작하셨다. 이성에서 어머니를 스쳐 지나간 모든 분들을 만나기 시작하시고는 오래전에 먼저 가신 아버지도 만나셨다. 어머니는 실제로 보고 계시 듯 아버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셨다. 옆에 새 부인인 듯 머리에는 채 수건을 쓰고 일을 하는 젊은 아낙이 있고, 어린 남자아이도 있다고 하신다. 그 모습이 어머니 당 신의 젊은 시절이 아니었겠어요.이런 세월을 1년여 지내시는 동안 우리 형제들은 매일 영화 한편을 보 는 것 같았다. 걷지도 못하시고 도로 어린아이로 돌아가신 어머니, 매일 삼 배 옷을 짜기 위해 베틀에 앉아 계십니다. 침대 맡에 걸려 있는 두루 마리 화장지로 길 삼을 삼으시는데 어쩜 그리도 정확하게 화장지를 삼실 처럼 가느다랗게 찢어내시는지 베틀에 앉아 철커덕 철커덕 배를 짜신다. 그러시다 가실 날이 다가옴을 느끼시는지 당신이 살아오면서 비켜간 도 시로 여행을 떠나시다.서울 대구 마산을 거처 창원 포항을 찍으시고 고 향마을 서화실에 도착하신 듯 손을 휘저으시며 동국댁 인국댁 창둥댁 중 국댁 월남댁 택호도 많으신데 우리는 다 기억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고향 들판에 노니는 소떼들도 보시고 고향집 뜰 앞에 누워 오침을 즐기는 누 렁이도 만나고 어머니 친정 곳 서촌에 들려 먼저 가신 외 조부모님, 이모 님, 외삼촌들에게 곧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시고, 친척들에게는 잘 있으란 하직 인사 나누시며 마을 마을을 다 돌아보신 시월 어느 이른 아침 희.노.애.락이 교차하는 93년의 세월을 마감하시듯 평안한 모습으로 우 리 곁을 떠나신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인이셨고, 저희들의 참어머니 이였습니다.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글 황보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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