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날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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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후덥지근한 여름날에 아버지날이 있어서 늘 궁금했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더운 여름날에 아버지날이 만들어 졌을까 했는데 비지땀을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들을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하루간 의특별한날이라도허리펴고쉬시라고재정한날이아닐까싶다? 나에게는 아버지날이 진정으로 마음이 울리는 날이다. 어머니가 나 의 가슴이라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머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 력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성정이 곧고 정직으로 곧 은 고집이 있으셨고, 약간은 무서운 사람으로 비친다. 어린 시절 우 리 아버지는 동네의 백 형사로 불리셨고 동네의 치안을 지키셨다. 청년들이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어른 대접을 하면서 아 버지의 지시대로 치안을 지켜냈다.

자식이 많으셔서 그런지 시골 초등학교이긴 해도 육성회장은 돌아 가시기전까지따놓은분이셨다.큰오빠는어려서부터서울로보 내졌고, 장난이 좀 많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둘째 오빠와 친구 들이자주장난질을하다아버지에게들켜야단듣는것을보았다. 우리 집에는 집 둘레에 울타리처럼 바람만 불면 싸락싸락 나뭇잎 부딪히던 대나무 밭이 있었다. 어느날둘째오빠와친구들이용돈이궁했는지밤에대나무를베 어다팔아먹었다.촘촘이서있던대나무밭에서몇그루베었기 로표가나지는않았을텐데시골장날에대나무를산장사꾼이아 버지에게 고자질(?)을 한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진 노하셨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하셨다. 오빠와 친구들이 그리고 친구들의 부모들까지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며 용서 해달라고했지만아버지는그부모들에게도호통을치면서내자 식 버릇 고쳐야지 무슨…다행히 경찰은 친족 뭐라? 하면서 법적인 효력이 없다면서 무죄를 선언 해 버렸다. 그이후오빠일당들은정말착하게살자로살았다.나의오빠는 망자가되었지만지금도살아계시는오빠친구들은나를보면그 때의 에피소드 이야기를 꺼낸다. 아버지는 대가족에 장손이라 가정 에필요한만큼삼을키워삼베천을만들었다.내기억으로‘삼밭’ 이라불리었던밭에는매년삼을키웠고,때가되면어른키보다큰 삼나무를베어대나무로만든칼로이파리를쳐내고큰가마솥에 쪄내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런데삼나무잎을쳐내면재빠르게마르지도않은삼잎을모아 서일부러밀집덩이를밑에깔고푸른삼잎을태워버리셨다.그 때는어린생각에그러시는아버지가이해가안되었다.며칠만밭 에 그냥두면 마를 생잎을 억지로 저렇게 태우실까 했는데 지금에 생각해보니그것이마리화나가된다는것을아버지는이미알고 계셨고,마른뒤에태우면마리화나냄새가온동네에이상한냄새 로의심받을것을알고미리생잎을억지로태워버리신아버지의 지혜가대단하셨다는것을알았다.건장한오빠들이그용도를알 았으면 삼 잎을 가만 두었겠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버지는 해방 전부터 일본과 만주, 용정에 자주 다녀오셨다 한다. 그래서 오빠들 셋도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 다.해방을맞아귀국할때까지의복은늘일본식단가즈봉(통좁 은 바지)에 나까오리(중절모)를 쓰시고, 한번 나가시면 몇 달 만에 돌아오시곤 했는데 그런 상황은 해방이 되면서 끝이 났다고 했다. 해방후에도무엇이그리바쁘신지집에계신적이많지않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빨치산에 가담했던 청년들의 목숨을 살린다 면서양식곳간에다청년들을넣고국군들이찾지못하게벽을만 들어 지켜냈다. 그러시는 아버지가 잡혀 갈까봐 가족들은 벌벌 떨 었겠지만 그 때도 아버지는 ‘젊은이들이 잠시 이데올로기가 뭔지 도 모르고 빨치산에 가담했지 알고 가담 했겠냐’면서 동네 청년들 을살려야한다면서집집에청년들숨기는방법을알려서많은청 년들이 살아남았고, 그들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생명의 은인으로 대접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 면서또아버지의할일이생겼다.정부가바뀔적마다아버지는 서울로가셨다.온몸에는논밭전지판돈을전대에숨겨온몸에 둘둘 두르시고 서울에서 정치하는 막내 동생 정치자금 전하러 다 니셨다.그런세월보내시다어느날말도없이돌아가버리신아 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끝까지 미스테리 한 분이셨다. 왜 그렇 게 외국으로 돌아 다니셨을까? 사업을 하셨으면 돈이 남아 있어 야하고,해방운동을하셨으면명예라도있어야할텐데이도저 도아무것도남은기록이없다.그래도아버지,당신은훌륭한아 버지이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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