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발업계 태동 그리고 전병직 회장의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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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코리아나 전병직 회장 회고록 “가발과 함께 50년” (1)

1960년대 초 가발상품은 대한민국 수출 1호였다. 이런 연유로 미주흑인뷰티시장을 한인 이민자들이 주도하게 된다. 국내외 한인 가발업계 종사자들의 피와 땀이 근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서도 업계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분들이 많다. 현역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 가운데는 전병직 회장(69)이 대표적이다. 그의 기억을 빌려 1960년대 이래 가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간 업계 종사자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많다. 다행히도 전 회장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전병직 회장은 20세 나이에 가발상품 생산업체 기계기사로 가발업계에 첫발을 디뎠다. 생산관리, 그리고 제품개발 디자이너를 거쳐 현 사업체인 (주)코리아나를 창업, 현재까지 50여년을 가발 제조업에 투신해 왔다. 원래 가발의 주요 생산지는 홍콩이었고, 주 고객은 유태계 백인들이었다. 한국은 1963년 소량의 인모수출을 출발로 1964년부터는 인모로 제작한 가발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가발 생산을 본격화 하면서, 홍콩가발회사들이 도산하게 된 것이다.

1966년부터 인조섬유(synthetic fiber) 가발생산과 함께 가발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가발 수요가 점차 줄어들면서 한국의 많은 가발생산업체들이 도산했다. 가발업계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흑인용 가발상품을 제조하면서부터다. 흑인용가발로 해외시장의 활로를 열면서, 한국가발업계는 백인용 가발생산업은 도산하거나 대폭 축소되고, 흑인용가발제조로 재편된다.

1970년대 말 당시 미성상사(주) 상품개발 담당자였던 전병직 회장은 업계 최초로 Crimp Curl 상품을 개발, 흑인여성용 가발상품의 폭발적 수요를 창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 회장은 이어서 1980년대 초에는 업계 최초로 Wet Look 스타일 상품을 개발, 흑인용 가발시장의 붐 조성에 일대 혁신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의 개발상품은 계속된다. 1980년대 후반 인모 Yaky Curl을 개발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섬유제품 Yaky Pony류 상품개발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Tape Curl 가발상품을 최초로 개발해 냈다. 전 회장은 현재까지도 새로운 헤어패션 상품의 출시를 주도해 가고 있다.전 회장은 한국 무역 1조달러 달성 특별유공자 31인 중 한사람으로 한국무역 1세대 영웅으로 불린다. 국가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가발을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번호부터 전 회장의 회고를 기술하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편집자>

“무조건 상경, 전파상 수선공, 재봉틀판매 수금사원으로…”

나는 1947년 충남 부여군 남면 시골 농가의 8남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인 나와 같은 경우는 특히 그랬다. 대학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생활 전선부터 뛰어 들어야했다. 다행이도 나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취미와 손재주가 있었고 “영특하다”는 평판도 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흥미로운 물건이면 이리저리 만지며 뜯어서 다시 조립해 보기도하고, 고장이 나면 고쳐보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눈썰미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트(ART) 감각이었다고 할까? 무슨 상품이든 눈으로 보면 제조의 원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 습관이 평생 나의 삶의 동력이 되었으니 그것도 운명이다. 1960년대,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갈 생각을 했었다. 당시 병아리 감별사로 독일에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나는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 부모님은 극구 반대 하셨다.

자식이 많아도 한 자식이라도 떠나보내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만류를 거역하는 것 또한 불효라 생각되어 포기했다. 그렇다고 농토도 부족한 처지에 시골에서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릴 적에 가수들이 부러웠다. 가수의 꿈도 꾸었었다. 나의 노래에 소질이 있다며 주변에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일단은 시골을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나는 어느 날 서울로 향했다. 서울 종로구 충신동에 고모님이 4남매와 함께 살고 계셨다.

남편과 큰아들을 6.25전쟁 때 잃은 고모님은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돌보셨다. 다행히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나의 형님이 먼저 고모님 댁에서 직장을 다니고 계셨기에 나는 상경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 동대문구 중앙시장 내 한 전파상에 취직부터 했다. 당시 전파상이란 라디오, 전기 제품 등을 수리하고, 판매도 하는 곳이다. 전파상은 여기저기 흥행했으나 월급은 겨우 4,000원 정도로 작았다. 3개월 정도 지났을까 형님의 소개로 새 직장을 잡았다. 그곳은 가정용 재봉틀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곳인데, 나의 업무는 할부판매 외상대금을 수금하는 일이었다.

판매부서는 외판원들이 많았다.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했다. 몇 달 근무하면서 나는 외판매원 활동지원에 대한 개선점을 발견했다. 판매원들에게는 일일 교통비가 아침에 지급되었었는데, 사무실 경리담당 직원이 오전 9시에 출근해 교통비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외판원들은 교통비를 받아서 시외버스 등을 타고 외곽으로 근무를 나가면 곧 바로 점심을 먹어야했다. 근무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외판원들의 월급은 실적에 따라 수당만 받는 형식이어서 외판원들은 한 대라도 더 팔기 위해 가능하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기를 원했다.

나는 수금을 담당했으므로 현금으로 수금한 돈을 경리담당에게 입금하기 전 항상 소지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와 외판원들을 위해서 입금 전 현금을 이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착안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하여 일찍 출근하는 외판원들에게 교통비 일당을 대신 지급하고, 수금한 돈을 경리에게 입금할 때 정산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판매 사원들은 오전 7시 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고, 판매 실적도 더 올릴 수 있었다. 경리부에서 해야 하는 일을 내가 대신 했기에 혹여 잘 못되면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나는 크게 신임을 받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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