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품 수정 과정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Yaky Wea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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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인모제품이 미국시장에 팔리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도 소량의 인모제품이 팔렸지만, 1980년대 들어서며 수요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당시 인모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염산 등 유해성 화공약품을 사용해야 했고, 탈색에서 염색까지 사용되는 모든 약품들은 환경오염물질이었다.

미성상사는 삼천리그룹의 계열회사였다. 인모제품의 시장성이 좋긴 했지만 제조과정에서 환경문제가 발생될 수 있었다. 인모제품을 직접 생산하기엔 크게 부담되는 이유였다. 당시 한국에서 인모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여러 곳이 있었으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원자재는 주로 중국 인모를 사용했었다. 그것도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중국내 인모를 확보한 홍콩 업체로부터 수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도 모를 인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인모 원자재 수급을 위해서는 많은 자금도 필요했다.

인모제품 제조는 과거 염색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작은 규모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원자재 수급을 위한 자금력이 없어, 소규모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다 보니, 미성상사가 인모제품을 직접 생산, 공급해 달라는 바이어들의 요청이 많았다. 하지만 환경오염을 야기하는 화공약품들을 사용하는 것이 혹여 그룹의 회장님께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직접 생산하는 것은 포기한 대신, 기술과 생산 능력은 있지만 자금과 영업력이 부족했던 “H”사에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임가공 하청생산을 맡기기로 했다. 미성상사의 자금으로 원자재를 수입해서 공급하고, 또한 바이어들로부터 상품 오더를 받아주면 “H”사는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인모 제품 생산 공장에서는 “H”사의 사장을 부러워했다. 우리가 주는 오더만으로 공장을 돌려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가 5~6년 지속되면서 “H”사도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다.

H사와 거래 과정에서 미국에서 바이어가 나오면 나는 ”H”사의 사장을 식사자리나 술자리에 가끔 불러서 인사도 시키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게 나의 실수였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H사의 사장이 휴일인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앞으로는 인모제품 임가공 하청이 아니고, 자기들이 직접 수출을 하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들도 이미 임가공 회사에서 벗어나 직접 수출을 할 수 있는 무역회사로 등록을 완료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섭섭 하였지만 이미 우리가 거래하는 바이어들과는 얘기가 된 상태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이어들 입장에선 같은 공장의 제품이니, 직접 오더하면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으니 그와 같은 제안을 먼저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구차스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H사가 받은 오더는 직접 거래를 하고, 미성상사가 받은 오더는 종전처럼 하청 임가공 후 선적토록 하였다.

이 무렵 중국 칭다오의 무역진출공사에서 인모제품 판로를 갖고 있는 한국의 6개 상사를 초청한 바 있다. 중국과는 수교하기 전이다. 수교도 되지 않은 나라로부터 초대된 것, 자체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성상사에서 제품에 관한 모든 것을 내가 관장하고 있었지만 이봉상 사장님께 다녀오시도록 권유했다.

한국업체 초청자는 중국의 칭다오 제2무역진출공사였다. 그들은 칭다오에 한국기술로 인모제품 생산 공장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중국 측은 인모제품 원료인 원모가 있고 또한 월급 $40.00-$50.00로 노동인력은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있으니, 한국에서 기술자를 파견해 중국원모와 낮은 인건비를 활용하여 제품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당시엔 중국에서 만든 제품은 미국에 직접 수출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중국산 완제품을 수입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삼각무역만 가능했었다. 한국의 6개상사와 중국 칭다오의 제2무역진출공사 간 계약이 이루어졌고, 한국에서 인원을 파견해 손쉬운 상품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 공장은 많은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어서 생각 외로 많은 양의 인모제품이 생산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6개 상사 가운데 미성상사를 제외하곤 해외 판로 영업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매일매일 다량의 제품이 생산 되기는 했지만 판로는 영업력을 갖춘 미성상사에만 기대하는 상황에 처했다. 미성상사가 제품을 판매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대부분의 제품을 미성에서 국내로 수입해 들여다 놓았다. 수십만 개의 제품이 들어왔다. 물량이 엄청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는 중국 공장에 한국인 생산책임자를 파견했기에 품질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완제품을 확인해보니 시장에 판매하기에는 어려운 불량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은 양도 아니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컬이 너무 강하게 제조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공장은 많은 인원을 투입, 생산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생산을 중단시키고, 몇 날 며칠을 밤잠도 못 자면서 고민하며 컬을 펴는 작업을 해보았다. 그런데 펌을 해서 컬을 했기 때문에 좀처럼 컬을 펴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스팀을 넣으며 고열로 펴보기도 하고 스팀다리미로 다려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신기하게도 스팀다리미로 컬이 스트레이트로 펴지는 것이었다. 한 가지 흠은 지지미와 같이 모발에 아주 작은 자국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또 다른 사용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스팀다리미로 수정한 견본 몇 개를 미국 뉴욕의 N바이어에게 보냈다. 일단 들여다 놓고 판매 후 상품대금을 상환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상품명은 “Yaky Weaving”이라고 표기했다. 상품을 판매한 후 대금을 상환하라는 조건인데도 N바이어는 약간 부담스러워했다. 1차로 몇 천개를 수정해서 보냈다. 그런데 이 상품이 신제품으로 불티나게 팔려가는 놀라운 결과가 발생했다.

문제는 중국공장에서 이미 서울로 수입해 온 불량제품의 수정작업은 제품 자체 제조 못지않은 시간과 비용이 큰 부담이었다. 중국공장이야 저렴한 노동력이 많이 있었지만 우리는 노동력이 또한 큰 문제였다. 더구나 나는 제품 수정과정의 비밀을 공장에 오픈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시간과 비용의 부담을 안고서라도 한국 내 공장에서 처리키로 했다. 작업을 순조롭게 해냈고, 불량품으로 수입 되었던 제품은 모두 판매할 수 있었다.

동 제품의 시장수요도 계속 늘어갔다. 잘 팔리는 신제품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성공과정을 중국공장에 알려줄 수는 없었다. 보안유지가 물론 안 될뿐더러, 중국 공장은 6개 한국 상사들의 공동 지분이었고, 중국 측 무역진출공사도 개입하고 있기에 우리 한국 상사들만의 공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 “Yaky Weaving” 제품의 주문은 계속 들어왔다. 나는 이 제품만은 한국에서 제조키로 결정 했다. 불량으로 제조된 상품을 수정하는 일에서 벗어나, 나는 처음부터 아예 Yaky Weaving 제품을 만들기로 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 성공적 결과를 얻어냈다.

중국공장을 통하지 않고, 드디어 한국 공장에 임가공 외주를 주어서 제조를 시작했다. 기계로 작업해야 하는 일이었다. 기계는 우리가 직접 제작하지 않았고, 기계제작업체에 우리가 아이디어를 주어서 용도에 맞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동 기계의 보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계 제작공장에서 기계를 다량으로 팔기 위해 다른 인모공장에 동일 기계를 공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공장은 기계작업으로 제조하지 않고, 작업과정이 좀 어렵지만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Yaky Curl을 우리만 단독으로 생산하는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방 일반화 되었다. 지금까지도 Yaky Curl이란 제품이 많이 팔리고 있다. 다만 공장마다 여러 형태의 작업 방법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형태의 제품으로 유통이 되고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초 많은 한국 공장들이 중국에 직접 투자해, 인모제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중국인 원모수집상들도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한국인 소유 공장들에게 원모를 팔러 와서 인모제품을 생산하는 과정들을 보고 노하우를 알아냈던 것이다. 이들의 제조업 시작으로 우리 한국 업체들이 제조업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미국에서 인모제품을 수입하는 바이어들은 주로 한국교포들이었다. 한국의 인모제품 생산 공장들은 한국교포 바이어들에게 한국 공장과 거래해 달라고 부탁하고 여러 유리한 조건을 제시 했지만, 결국 중국 공장들의 저가 공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인모제품은 중국인이 생산하는 공장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의 한국교포 바이어들끼리 중국인 공장보다는 한국인 공장과 거래하자고 합의도 보고 했지만, 뒤로는 중국인 공장들과 독점으로 거래를 하자고 제안하는 바이어들도 생기면서, 그런 합의는 유야무야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후 얼마 못 가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인모공장들은 대부분 정리가 되고, 인모제품 생산은 중국인 공장으로 모든 게 옮겨가게 되었다. 미국의 한국교포 바이어들도 중국공장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주겠다 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제품의 수입 가격이 월등히 차이가 나면 한국공장만을 고집한 바이어들은 시장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국애족보다 현실 이익을 먼저 쫒는 게 비즈니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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