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에 이용면허 자격증 획득한 박영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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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봅니다 | 노년의 꿈, 거침없이 도전한다]

늘 꿈꾸어 오던 일을 한번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끝까지 해보고 싶네요!

박영례씨(71)는 다섯 번 도전 끝에 “이용(barber)면허”시험에 통과, 자격증을 획득했다. 2018년 6월 이용학교(Eclips Barber School, St. Loius, Missouri State)에 입학, 7개월 집중코스(1,000시간) 과정을 마치고, 2019년 3월 실기시험에 합격한 후, 필기시험에 도전했었다.

“제가 영어가 아주 짧아 이용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요. 수업 내용을 1/3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제대로 공부가 될 리가 없었던 거지요. 게다가 20살 내외의 흑인 청소년 학생들 가운데 딱 한 사람, 나이든 동양인 할머니가 저였거든요. 그나마 영어를 못하니, 그룹실기 학습에서는 아예 배제하더라고요.” 박씨는 힘들게 학교에 다녔던 기간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오기로 버텼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어렵게 1천 시간 학교 공부는 이수했지만, 박씨 앞에 놓인 더 큰 장애는 영어로 필기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다. 박씨는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일반 헤어컷 정도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는데, 특히 캐미칼 분야 펌이라든지 염색을 하는 기술적인 문제 등은 영어로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학교 졸업 후인 지난 2019년 4월부터 20개월 동안이나 걸쳐 면허 필기시험에 도전하고 또 도전해야 했다. 4번 낙방했다. 지난 2월초 다섯 번만에 기어이 합격했다.

왜 하필 흑인들을 위한 학교에서 공부를 했을까? “저 같은 낮은 인컴인 경우는 흑인들이 보통 선택하는 무료 집중코스를 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흑인 머리는 깎는 게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백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까다롭지 않고, 좀 더 쉽게 서비스를 할 수 있어 흑인학교를 택한 거죠.”
일반 여성 헤어컷 기술도 선택할 수 있는 데, 왜 하필 남성, 그것도 흑인 이발 학교를 택했을까? 그게 더 궁금했다. “이발사셨던 저의 부친이 전북 군산에서 이발소를 하셨어요. 그런데 1960년대 미군부대가 군산에 주둔하면서, 아버님이 부대 이발소에 취직을 하셨답니다. 이게 미군부대 이발소 운영권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저의 모친이 부친보다는 사업적인 수완이 더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모친의 아이디와 투자가 합쳐져서 작은 ‘이발소’를 ‘기업’으로 발전시키셨답니다. 이 이용(理容) 기업을 저희 집안 형제.조카들이 이어받아 3대째 운영하고 있어요. 저도 어려서부터 부모님 사업을 가끔씩 도와드렸기 때문에 이용사업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하기까지 2년 정도 매니저 일도 좀 해보았고요.”

박씨의 얘기를 듣고 겨우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청년 시절 이발기술을 배워온 박씨의 부친은 군산에서 이발소를 시작, 많은 제자들도 또한 길러낸 한국의 이용업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당시 군산은 일제하에서 아주 번성했던 대도시였었고, 멋쟁이들이 많은 곳이어서 특히 이발업이 성업했다고 한다.

동네 이발소로 시작된 이용(理容) 가업(家業)은 윤씨의 오빠가 이어받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비행기 여승무원들 선발하듯 재능있고 미모도 갖춘 젊은 여성들만을 골라 교육을 시켰고, 멋진 유니폼을 착용시켜, 헤어컷 이외에 면도, 페이스 마사지 등 전문 서비스를 추가시켜 현대화시켰어요.”

박씨 가문이 일으킨 이용업(理容業)이 현대화되면서 군산 외에 평택, 오산, 괌 그리고 미국 본토까지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군들 사이에는 ‘천국’으로 소문났고, ‘00이용실’을 가보았느냐는 질문이 인사가 될 정도였답니다.” 박씨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저도 70을 넘겼지만, 아직 정신도 신체도 건강하니, 말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지요. “라고 덧붙인다.

박씨는 1974년 재일동포와 결혼, 일본으로 건너가 34년을 동경에서 식당업과 액서사리 사업 등을 하며 아이들(2녀1남)을 낳고 길렀다. 50대 중반, 뜻하지 않게 이혼을 하게 되면서 미국 이민을 꿈꾸었다. 10년 전 우연한 계기로 미국을 방문, 재미동포와 재혼했다. 그런데 불행히 2년 전 사별하는 불운을 겪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 넓은 미국에 친척도 자식도 없이 혼자만 덜렁 남게 된 거지요. 생활문제도 문제였지만, 무슨 꿈으로 사나 그게 제일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1970년대 당시는 일본 가는 것도 꿈이었지요.미국은 물론 더 큰 꿈이었고요. 저는 70평생을 살며, 꿈만 찾아다닌 셈이죠. 두 꿈은 이루었으니, 마지막 도전을 해보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 혼자이니 생활이야 어떻게든 꾸려 나가겠지요. 하지만 단 한 번뿐인 귀중한 인생을 이대로는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생활 10년째, 겨우 영어로 의사 표시 정도는 하게 되었고, 이제는 미국사회에 들어가 더 열심히 살아볼 작정입니다. 아직 10년은 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박씨의 꿈은 작지 않아 보인다. “어렸을 적부터 이 비즈니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요. 이 비즈니스를 택한 이유지요. 비교적 저로서는 편하게 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그렇다고 쉬운 비즈니스는 아니예요. 손님들과 이런 저런 얘기도 재미있게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손님들이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게 이발을 마칠 수 있게 해야 한답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배려가 아주 중요해요. 기분 안 나쁘게 해야 단골고객이 되기 때문이죠. 커트하는 것은 기본이고, 고객의 직업에 맞춰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테크닉도 아주 중요합니다. 페이스 마사지도 필요한 경우 해주어야 합니다.”

박씨는 현재 흑인 이발소 인턴십을 찾고 있다. “사실은 제가 흑인 아이들과 학교에 다니면서 흑인들을 대하는 것이 무척 두려웠어요. 나약한 동양 여성으로서 어떻게 흑인 남성들의 머리를 해줄 수 있을까 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난해 부터 뷰티서플라이 스토에서 일을 해보니, 흑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순수하고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용기가 더 생기게 된 겁니다.” 박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국내에서 이 사업을 하고있는 형제들은 나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함께 하자고 하는데, 그토록 꿈꾸던 미국 생활, 이제 고생 고생하여 겨우 10년을 넘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특히 제 부모님께서 생업으로 하셨던 미용업을 여기 미국 땅에서 제 혼자 힘으로 성공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제 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여기고 뛰어볼 생각입니다.”

박씨를 얼핏 대하면, 말씨와 행동이 일본인 닮았다. 여리고, 조용조용 얘기하고, 모든 걸 솔직히 얘기한다. 꾸밈이 없다. 이런 대단한 용기, 꿈, 그리고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의아스러운 이유다. 박씨의 꿈이 이루어져 또 하나의 ‘인간승리’, 아메리칸드림의 기록으로 남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이계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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