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졸업하면 집을 팔 테니 팻말을 준비하라는 K의 말이 떨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K의 입에서는 귀국 준비 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동포사회의 이야기가 자주 거론 되었다. K는 매일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이곳 한인동포 사회는 할 일이 많다.” “미국 사회에 동포들이 기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미국 신문과 TV를 보는 동포들이 거의 없고, 한국 신문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위해 미국에 왔다면 삶이 너무도 무의미 하지 않나?” “동포사회가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동포사회가 코리안 프라이드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에는 사회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여유 있는 리더들이 많고 많지만 이곳 동포사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래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미국에 많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한국으로 돌아 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렵고 힘들 때 나의 하소연을 들어 줄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있다 해도 ‘겉 돌이’ 친구 관계가 정말이지 싫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더 보고 싶고 가족들이 그리워 졌다. 사는 그 자체가 짜증스럽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부하여 돈 쓰는 즐거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X-RAY GRID 사업 덕분에 신문과 뷰티 타임즈가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힘 드는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폐간하고 싶어도 지역 동포들의 인권이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 독자가 볼멘소리로 전화를 했다. 자기 딸이 미술대학을 다니는데 시청이 운영하는 도시 버스가 주최하는 그림 공모전(상금 $1000)에 합격해서 추운 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버스에 그림을 그렸는데 담당자가 상금을 반으로 뚝 잘라 5백 달러만 보내 주었다며 억울함을 전해 왔다. 나는 신문사 기자라고 밝히고 담당자에게 전화하여 나머지도 보내달라고 요구 했다. 신문사라는 소리를 듣더니 그녀는 즉시 미안하다면서 나머지 금액을 바로 보내 주었다. 그래서 지역마다 커뮤니티 민족 신문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일 때문에라도 없앨 수는 없었다.
Beauty Times 같은 상업지도 어렵게 장사하는 분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였다. 하지만 Beauty Supply 사업에 대해서 전혀 접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잡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2-3년 만들어 보니 기사 제공에 있어서 한계에 부딪쳤다. 그래서 사무실을 좀 더 흑인가로 옮겨 흑인사회는 물론 뷰티서플라이 스토아들과 함께 하면서 잡지를 만들자고 K는 나를 종용했다. 호랑이굴속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한국으로 귀국하자는 투정을 부려보지도 못하고 흑인가 쪽으로 사무실 옮기는 것만이라도 막아 보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흑인가는 위험하고 무섭다던데?” 흑인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모아 K에게 전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K가 입을 열었다. “그들도 사람이다. 그들과 섞여 지내며 사귀고 정을 붙여 보자, 사람 사는 거 다 같다” K는 나를 설득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K의 설득은 성공했다. 사무실을 계약하고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고 소질도 없는 솜씨로 손 볼 곳은 고치고 카펫트도 손수 깔았다. 사무용 집기들을 챙겨서 이사를 했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한 7층 건물 2층에다 짐은 풀었지만 흑인지역이 무섭고 생소한 곳이라 걱정이 앞섰다. 직원수에 비해 넓은 사무실은 썰렁하게 느껴졌고, 음산한 주위의 모습을 보면서 공포감만 앞섰다. 다만 사무실 창에서 길 건너 주차장에 세워 둔 우리 차가 보여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다행히 바로 옆 건물에 뷰티 서플라이 스토어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뷰티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자주 공부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알차게 잡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낮에 옆 방 직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뭐야 뭐야” 직원들이 다 그 방으로 모였다. 이 백두 대 낮에 길 건너 주차장에 세워둔 직원의 예쁜 빨간 차에 흑인 두 사람이 달라붙어 타이어를 빼고 있었다. 차주인은 달려가고 다른 사람들은 창밖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어 어”소리만 지를 뿐, 타이어 하나가 날아갔다. 그 일은 우리에게 닥쳐 온 첫 사건이었다. 우리는 맥이 풀어져서 며칠 동안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이른 아침, 아래층에 있는 흑인 변호사가 평소보다 좀 일찍 출근 하다 그 주차장에서 봉변을 당했단다. 가진 돈 다 털리고 머리에 둔기로 얻어 맞아서 작은 수술을 하고 머리에 미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출근을 했다. 어느 날은 그 건물 안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건물 내 휴게실에 거의 다 모였다. 건물 코너를 지나다 전 남편이 달려들어 면도날로 얼굴을 그었다며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도 태연스럽게 얘기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4층 마약 훈련 센터에서 일하는 흑인 여직원이었다. 그런 끔찍한 얘기들을 들으면서도 차츰 놀라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에도 나는 이제 그렇게 길들여져 가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