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역협회 창립을 리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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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타임즈>때문에 여력이 없어 플로리다판 신문을 분가시켰다. 2주에 한번씩 프린트하던 신문도 월간 신문으로 줄였다. 뷰티타임즈는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해외 구독자도 생겼다. 타블로이드판에서 매거진 형식으로 틀을 바꾸었다. 형식이 바뀌면서 비용에 맞는 프린트 회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기는 했지만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들었다. 한 달 광고비 받아서 프린트 회사에 주고나면 우리는 또 곶감을 빼 먹어야 했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 한국에서 프린트를 해 올까하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에서도 프린트군단이 있었다. 용산, 문산, 군포 등 좋은 회사를 찾았지만 잡지 배포가 문제였다. 한 달쯤 늦게 배포되기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뷰티타임즈 소식을 듣고 외국인이 전화를 했다. 본인이 유태인이라면서 처음 미국에 정착하여 세탁업을 했는데 한인들이 이 업에 진출하면서 어려워 정리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뷰티서플라이 사업에 손을 댓는데 또 한인들이 달려들어 가격경쟁을 하면서 시장을 흐려 놓아 그마저 정리를 하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한다면서 제발 한인들이 뷰티 서플라이 만큼은 잘 건사하여 오래오래 보존했으면 좋겠다고 당부를 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비슷한 전화들이 가끔씩 이어졌다. 우리는 편집회의를 통하여 뷰티서플라이업계를 잘 키우고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고 전 직원이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인들 보호차원에서 한인스토어에만 배포하기로 했다. 비 한인들도 구독을 하겠다고 했지만 우리 매거진은 ‘한인들만을 위해서 한글로만 발행되는 잡지’라며 거절했다. 그들은 광고 페이지만 봐도 된다면서 구독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보내주지 않았다.

K도 열심히 현장을 취재하고 교육적인 정보를 찾아 다녔다. 미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열리는 트레이드 쇼에도 쫓아 다니면서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고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당시 30-40여명의 멤버를 두고 있는 NBSDA라는 뷰티 서플라이협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지역 협회들은 없었다. K는 지역 협회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지역협회 창립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우선 뉴욕, 뉴저지, 시카고, L.A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지역 리더들을 만나 협회정관을 만드는데 도움을 두고, 협회 창립 소식 및 초대 회장 인터뷰 등을 뷰티타임즈에 실어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계속되었다. 재력이 부족하니 비행기를 타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였다. 미국의 운전거리가 웬만해야지, 혼자 운전은 감당이 어려우니까 운전 해줄 사람으로 나를 동참 시켰다. 나는 집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고민에 빠지곤 했는데 그래도 장거리 운전을 혼자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따라 다녔다. 미국 지도 한 장 들고 각 지역을 찾아 협회 만들 것을 안내 했다. 참으로 많은 지역으로 다녔다. 그 뿐이랴. 뷰티에 관계되는 분들의 경조사까지 쫓아다니며 미 전국을 거침없이 달렸으니 이제는 길 도사가 다 되었다. 길에서 보낸 시간이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 정도로 헤매던 사이 우리가족에게도 영주권이 나왔다.

그 동안 다른 직원들에게는 영주권을 발행해 주면서도 우리가족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E2비자였기 때문이다. 영주권을 받고 난 후 기분은 달랐다. 우선 나도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동안 무보수에 과중한 업무가 불만이었는데 보수가 많든 적든 미국에서 내가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신분 해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주권이 생기니 자신감도 절로 생기고 그 동안 한국으로 귀국 할 날만 기다리고 살았는데 이제는 미국 땅에 작지만 우리의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또한 신분 해결로 인하여 점점 이민자로서의 책임감도 생겼다.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는 더 열심히 살며, 봉사하며 타 민족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는 각오도 생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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