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잘 적응하려면 남의 도움 없이 헤쳐 나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참으로 친절하다. 친절이 몸에 밴 동네 이웃들, 그들이 친절해서인지 금방 친해 졌다. 그들도 자기들의 이웃으로 새로 온 젊은 동양여자가 신기하게 보였는지 관심을 가지고 이집 저집에서 초대해 주었다. 남편들이 출근하고 대충 집안 정리가 되면 이집 저집으로 돌아가며 tea 타임을 갖는 미국 여인네들, 한국 여인네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도 만나면 남편이야기, 아이들의 방과 후 이야기, 아이들 학교생활 이야기로 한 낮을 보낸다. 가끔은 디너 이벤트에도 나를 데려가서 소개해 주었다. 특히 옆집 아저씨는 커피머그잔을 들고 뒤뜰에 서서 내가 바깥에서 일을 하면 늘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실제로 무거운 짐을 내리거나 힘든 일을 가끔 도와주었다.
K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남아서 그 동안에 벌려 놓은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1년 뒤에 미국으로 왔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지나가는 작은 트럭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Lazy, never get a vacation!” 이 글귀가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박혀버렸다. 그렇지, 낯선 나라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려면 부지런해야만 살지. 놀 것 다 놀고 어느 누가 내 입에 풀칠 해 주랴. 이 글귀는 내가 살아가는데 두고두고 삶의 지침서 역할을 해 주었다.
K는 그 동안 가족이 없는 삭막한 사막에서 많이 지쳐있었다. 몇 개월을 몸과 마음을 쉬고 단련하여 우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X-ray grid 사업이었다. 생소한 일이긴 했지만 한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전 세계에 수출하는 일이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우리는 매일 매일 광고지와 설문지를 전국으로 보내고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많은 회사들이 호응을 해 주었다. 짧은 기간에도 600여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선 300여 회사와 거래를 오픈하면서 미국 생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집 가까운 곳에 사무실도 열었다. K는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는 대학원(MBA)에 다녔다. K가 학교에 가고나면 그 이후의 일은 내가 처리했다. 사업은 노력한 만큼 성장하고 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남미, 남미, 인도, 심지어는 유럽에서까지 주문이 들어 왔다.
그러는 중에 가족도 두 명이 더 늘어 아이들이 넷이 되었다. X-ray grid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K의 관심은 다른 데로 기울기 시작했다. 한국의 한겨레신문이 시카고에서도 런칭을 하고 발행되었는데 평소 좋아 했던 한겨레신문에(주주이기도 함)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동아일보 입사시험에 합격했으나 어머님의 뜻대로 기자의 꿈을 접고 회사원이 되었던 K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열심히 글을 쓰고 시카고를 오르내리는 1년 8개월 만에 자금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신문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문 닫는 날 통곡하는 전 직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언론은 역시 힘은 있는데 매력은 없는 것으로 느꼈다.
집으로 돌아 온 K는 며칠을 두문불출하더니 지역 신문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나는 또 반대를 했다. 그 힘든 일을 왜 또 하려느냐고… 학교와 사업과 신문 일에 매달려 조용하게 살게 해 준다던 약속이 무너질 것을 생각하면서 극구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집은 꺾지 못했다. 신문은 “한겨레저널”이라는 이름을 달고 격 주간지로 발행되었다. 그러던 중에 마이애미에도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서로 매달 두 번씩 프린트를 해서 주간지나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만들면서 K는 취재 핑계로 가끔 잠적하곤 했다. 한번 나가면 일주일씩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고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지금은 통신망이 편리하게 되어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가는 사람 뒤통수 보고 들어오는 사람 앞 꼭지 보면 안심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다.
미국 생활은 나를 점점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또한 매년 E4비자 갱신하는 일도 귀찮았다. 미국에서 갱신하는 것이 아니라 캐나다까지 직접 가서 갱신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 해에는 갱신하는 날짜를 놓쳤다. 한국으로 출국 명령이 떨어졌다. 나와 두 아이가 한국에서 4개월 동안 묶여서 광화문 미 대사관의 문지방이 닳도록 매일 출근 한 적도 있다. 별 서류를 다 해 다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애 태우는 것을 본 옆 사무실 미국 할아버지가 도와주었다. 그는 주지사와의 연분으로 주지사의 편지 한통을 한국에 있는 미 대사관으로 보내줬다. 전화가 와서 가 보니 내일 당장 출국해도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신분을 확보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것도 돈의 위력이다. 미국 할아버지 말씀이 정치 헌금을 조금씩 내면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 회사직원에게도 그런 경우가 두어 번 있었다. 직원이 한국으로 가면 못 들어오는 신분 상태를 무시하고 한국에 가서 묶였다. 가족은 여기에서 발을 동동 굴리는데 어쩔 수 없이 미 하원 원내총무에게 낸 성금이 생각나서 부탁을 했더니 기회를 주었다. 이 땅에 내 모든 것을 묻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내가 속한 미국 이웃도 돌아보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현실은 힘들었다. 프린트 값도 감당해 내지 못하는 신문은 그래도 여지없이 프린트되고 K는 여전히 돈 버는 것에는 관심 밖이었다. 점점 힘들어 가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수입도 없는 신문을 매주마다 발행하려면 지출을 줄여야 했다.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지출은 다 줄여야 했다. 가정메일로 보내게 되는 비용을 줄이려고 신문을 우편번호별로 분류하여 중앙 우체국에서 벌크로 보내면 싸니까 그 방법을 중앙우체국에 가서 배워오라며 나를 보냈다. 나는 짜증을 부리면서도 남편의 일이라 마다 할 수 없어서 중앙우체국에 가서 자세히 배웠다. 처음에는 분류 작업을 우리 집 부엌바닥에서 하다가 신문의 잉크로 인하여 바닥이 너무 더러워져서 밴 차 안에서 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날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몇 년을 그렇게 수작업을 하다가 조금 발전한 것이 메일링회사에다 맡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