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고 승승장구 성장하던 Y사가 갑자기 부도 위기설이 나돌았다. 한국 발 소식에 의하면 집권자의 횡포라는 것이었다. 지사 내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하게 변해 갔다. 나의 사우디아라비아 생활 1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 100여명이나 되던 지사 사람들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 서로 다투어 짐을 쌓다. 청운의 꿈을 펼치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첫 직장, 위, 아래, 좌. 우 어디를 보아도 선후배로 똘똘 뭉친 젊은 회사, 이를 키워보겠다고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도 버리고 누구보다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강했던 K는 매일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리고 끝까지 남아서 정리를 하던 중에 사우디 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며칠을 갈등하고 고민하던 K가 내게 마지막 결단을 맡겼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도 방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상황, 한국에 나가서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살 것인가, 현지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여 또 생지옥 같은 세월과 싸울 것인가를 놓고 고민 고민 하다가 현지 회사의 손을 잡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책임감이 강한 K는 지사 정리를 마무리하고 마지막 볼모로 잡힌 이사 한분까지 우리가 모시자며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로운 일에 매진했다. K는 성실히 일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어쩌면 운도 따랐다고 본다. 건설마케팅에서는 아무도 따라 갈 사람이 없을 만큼 유능한 사람이 되었다. 굴지의 한국계 건설 회사의 중역들은 겨우 30대 초반의 K같은 젊은이와의 미팅 한번 잡아 보려고 줄을 섰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장남으로서 한국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경제적 기반을 다져 주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 못한 동생들은 유학을 보내주었고, 그리고 사업을 하겠다는 동생에게는 회사를 설립해 주면서 검은 오일 달러의 위력을 뿜어냈다. 또한 K는 유능한 친구 세 사람과 동업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동업은 쉽지 않았다. 1년여를 버티다 K는 빠져 나왔다. 첫 동업은 그렇게 실패작이었다. 얼마 뒤에 또 다른 친구들이 몰려와 동업을 시작했다. 그 일도 그리 잘 되지 않아 흐지부지 없어졌다. 두 어 차례 동업의 쓴맛을 본 K는 절대 동업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우리에게도 아이 둘이 태어났다. 삭막하던 내 생활에도 다소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사실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곳은 돈도 있고 가족까지 함께 해도 삶 그 자체는 여전히 허기지는 곳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는 세상, 창살 없는 감옥이란 말도 있었다. 거기다 밖에 나가면 이글대는 태양열과 눈을 뜰 수 없는 사막의 모래바람, 하루하루 정신이 혼미 해 져 가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일하는 건설 현장 근로자들을 보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나는 투정을 부릴 염치가 없었고, 오히려 사치스럽다고 자위하면서 버텨온 세월이 6년이었다.
한해 한해 세월이 흐르며 한국으로 보내지는 달러도 쌓여 부강해져가는 나라, 부유해져가는 가족들을 엿 볼 수가 있었다. K의 일은 무리 없이 잘 풀렸다. 가난으로 신혼 방을 차리지 못하고 사막으로 떠나야 했던 지난 세월,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 셈이 되었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Y회사 부도로 뿔뿔이 흩어졌던 K의 동료들이 한 둘씩 사우디아라비아로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재기한 그들의 모습이 당연해 보였었다. 젊은 회사 하나 잘 만들어 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다 날벼락을 맞고 쓰러질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퍼상을 만들어 중동을 대상으로 개인사업을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곳에 가족으로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러 오면서 K를 찾아 왔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면 될 터인데 한 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대부분 가방을 밀고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곤 했다.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사람은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두 달씩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한국의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킨 K는 몇 차례 회사일로 미국을 다녀오면서부터 미국병이 들기 시작하였다. 매일 매일 미국으로 가자고 졸랐다. 어린 두 아이는 어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미국에 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K의 미국행 목표는 공부하는 것이었다. 여지껏 사람들 치다꺼리만하고 살았으니 좀 여유 있게 살도록 해 주겠다며 나를 달랬다. 몇 달을 티격태격하다 여름휴가를 맞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며 미국이 어떤 곳인지 한 번 가 본 후에 결정하자는 K의 말에, 마지못해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을 출발, 뉴욕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나흘 동안 뉴욕일대를 관찰하면서 우린 서로 표현은 안했지만 마음속으로 가위표를 그었다. 다시 L.A로 날아가 디즈니랜드부터 구경을 하고 이곳저곳을 관찰했는데 여기도 아니었다. L.A 풍경이 싫었다. 눈뜨면 펼쳐지는 시뻘건 사막이 우선 싫었다. 핑크빛이어야 할 우리의 신혼이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 묻혀버렸기에 사막분위기는 정말 싫었다. 또 한 가지는 계절이었다. 사계절 속에 익숙한 우리는 일 년 내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밋밋한 계절이 정말 따분하고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