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계신 80대 선배를 찾아뵈었다. 회복단계에 계신다면서 오히려 내게 저녁을 사주셨다. 본인은 아직도 죽이나 주스 정도만 드신단다. 맛있게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요즈음처럼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인 적이 없어요. 먹고 마시는 일상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깨닫습니다.”
선배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일상도 되돌아보았다.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났고, 이제 아내와 단둘이만 남았다. 요즈음 나는 은퇴를 준비하며 난생 처음으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 아내는 아직도 생업에 바쁘다. 집안일이라도 내가 할 작정으로 설거지, 빨래, 다리미질, 집안청소…등은 내가 맡아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로부터 교육을 받고, 야단을 맞으면서 하나씩 익혀간다.
살림이라면 끝내주게 했던 아내 덕에 나는 편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 넷을 기르면서 온갖 집안 살림은 물론 바깥일까지도 빈틈이 없었다. 집안 살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르거나 모른 채한다. 나야말로 그랬었다. 집안 살림 일부를 내가 해보면서 진짜배기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수고 속에 위대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한적한 생활 속에서 느끼는 선물이다.
19세기 서양의 노자(老子)로 불리는 헨리 데이비스 소로는 하바드대를 졸업하고 자본주의 노예가 되는 삶을 포기하고, <월든>이라는 숲속 마을에 들어가 2년2개월간 통나무집에서 혼자 살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혼자 살면서 집도 스스로 짓고, 감자, 옥수수, 완두콩, 채소를 경작했다. 돈이 필요할 때는 막노동을 했다. 그는 1년에 6주가량만 일하면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하고, 사유(思惟)하고, 친구를 맞이하면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자기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삶의 지침서 <월든>을 썼다.
소로는 저서 <월든>을 통해서 더 많이 갖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고, 가질수록 상대와 비교하면서 더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의 삶을 지적한다. 결국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들을 위해 우리는 왜 그토록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가? 단 한번 주어진 인생, 황금 같은 시간을 무엇에 쫒기 듯 낭비하는가? 왜 우리는 멋진 주택, 고급 자동차를 가지려고 기를 쓰고 더 많은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리고 이를 물려주려고 숨을 헐떡거리고 사는가?
소로는 부질없는 일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살지 말고, 자기만의 삶을 살면서 일상의 아름다운 열매를 따 먹으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삶은 결국 작은 일상의 삶에서 시작 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작가 김선미는 소로의 지혜를 얘기하면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 잘하는 살림만이 아니라 죽은 것을 되살아나게 하는 살림. 병든 몸을 살리기 위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기르고 만들고 나누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내는 일. 내가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던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것을, 동갑내기 스승(소로)이 일깨워준, 돈을 뛰어넘는 살림의 지혜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살림”은 “살리다”를 뜻한다. 소로는 필요 이상으로 ‘벌기 위해’ ‘얻기 위해’ 살지 말고 정말로 ‘살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살리는 삶을 권한다. 일상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라는 거다. ‘간소한 삶’ ‘고독의 삶’, 그리고 ‘명상의 삶’을 통해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을 하며 살아보라는 거다. 산속에서 노루가 한 마리가 뛰면 모든 노루들이 함께 뛰어가듯 살지 말고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보라고 충고한다.
소로가 충고한대로 노년이라도 진짜배기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은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정 반대로 사는 것일 거다.
위보다는 아래를 보고, 새 친구보다는 옛 친구들을 다시 찾아보고, 호화로움보다는 소박함을, 육체보다는 정신의 즐거움을, 바깥보다는 안쪽을 즐기는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