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근 나는 한꺼번에 어금니 세 개를 발치했다. 아니 뽑혔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 일게다. 미국인 치과 의사가 잇몸이 아프다는데 한꺼번에 세 개의 이빨을 발치 해 버렸다. 뽑힌 어금니를 자세히 보아도 이빨에는 문제가 전혀 없어 보였다. 상하지도 않았고 그저 예전에 크라운만 씌워두었던 것인데 왜 이빨을 뽑아야 하는지 뽑힌 뒤에 씩씩대며 흥분을 해 보았지만 이미 내 이빨은 날아 가 버렸다.
뽑힌 이가 아까워서 법적 대응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흥분을 할 때 남편도 같은 경우를 12번이나 당했다면서 미국 치과 의사들을 이해 못하겠다며 합세하여 ‘불신’ 하기 시작하였다.
그 치과 의사는 두어 달 그 자리가 아물면 임플란트를 하라고만 권했다. 가끔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스케일링을 한다든가 이빨에 문제가 있으면 한국에 있는 치과를 찾아 갔는데 한국 치과 의사는 가능하면 본인의 이빨은 살리고 잇몸을 치료 하면서 최악의 경우에만 발치를 하라고 권하였다. 그에 비해 미국 치과 의사들은 잇몸 치료를 해 볼 생각도 하기 전에 발치하라고만 종용한다.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해서 임플란트로 그 자리를 메꾸기로 하였다.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서는 내 이빨을 맡길 치과 의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도시에서 소문났다는 미국인 치과의사와 임플란트만 전문으로 하는 의사를 몇 사람 만나 보았지만 한 사람도 내 마음에 자리 잡은 ‘불신’을 지워 줄 치과 의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5시간거리에 있는 한인 치과 의사와 약속을 하고 달려갔다. 그는 참으로 친절한 한인 2세였다.
한국말은 의사소통 정도로 할 수 있었지만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재미있어서 물어 보았다. 아마도 부모님께서 저 경상도 어디에서 오신 모양입니다? ‘네, 창원이라 카데요. 저는 아직 못 가 봤심더. 아이고 가볼 필요가 없네요. 선생님이 창원이시구먼, 우리는 한참을 깔깔 껄껄 웃었다.
임플란트 하기 전에 그 자리가 휑해서 임시 틀니를 해야 된다고 했다. 아~ 그 부분 틀니? 그러면서 매일 밤 남편이 빼 놓았던 부분 틀니가 생각났다. 밤마다 자기 전에 빼놓은 부분 틀니를 보면서 ‘평소에 이빨 관리를 잘하지 이게 뭐야’라며 혼자 흉도 보고 핀잔의 소리도 늘어놓았었는데 내가 부분 틀니를 해야 한다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뒤에 부분 틀니를 착용 해 보니 참으로 불편한 일이었다. 음식도 제대로 씹어지지 않고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매번 양치를 하면서 빼 두었다가 다시 끼우는 것을 까먹어서 제대로 착용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봄쯤에 본 그레프트를 하기로 했는데 당겨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 동안에 치아 문제로 힘들어 했던 남편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임플란트 가격이 워낙 비싸서 한 해… 한 해… 미루다 지금까지 기회를 놓친 남편에게도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오랫동안 부분 틀니를 가지고도 가정 형편 눈치만 보고 살아 온 남편도 최근에서야 시니어 덴탈 보험에 가입을 했다. 가입 후 3개월 뒤에 보험증을 들고 이 치과 저 치과를 돌아 다녀보았는데 또 웃지 못 할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그 보험으로는 1년에 2개씩만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남편은 12개를 해 넣어야 하는데 5-6년을 또 기다리라는 이야기이다. 어이가 없었다. ‘기다리느니 죽지’라며 남편은 빚이라도 내서 임플란트 한다며 한국으로 떠났다. 미련한 동물이 곰이 아니라 인간이라더니 그렇다. 인간은 왜 경험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일까? 우리는 왜 불신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한국으로, 또는 한인 의사를 찾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통하니까?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같은 족 속이라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니까? 많은 이유가 부여 되겠지. 매를 맞아도 내 부모 형제에게 맞는 것이 덜 억울할 테니까… 그런 이유가 우리를 신뢰하게하고 하나로 묶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 우리 업계에도 ‘불신’으로 인하여 불편한 관계가 조성 되어 가고 있다. 공급자와 구매자와의 사이에 불신이 생긴 것이다. 공급자 측에서 하는 주장과 구매자 측에서 하는 주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사고’이다.
같은 생각들이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스러운 주장만 하다가 ‘너 하나쯤 아니라도 우리 물건 팔수 있어’라는 마인드가 생겨나는 것이고, 구매자 입장에서는 ‘그 상품 아니면 장사 못할 줄 알아’ 식이다. 요즘처럼 경쟁이 심한 시대에 그런 것이 어디 있어? 하지만 아니라 외치면서도 보이지 않는 내면속에 소리 없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라는 공동선이 무엇일까? 생김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 보지 못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에게만 해 보는 아이스러운 행동이 있다. 의지하고 어리광도 부려 보고 싶은 대상이 ‘같은 우리’이기 때문에 때를 써 보는 것이 아닐까. 어떤 형태이든 ‘불신’이라는 단어는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 불신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부질 없는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도 뒤 늦게 깨닫겠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보니 그런 것에 필요 이상의 자존심을 세운다.
이런 일로 업계가 흔들리고 힘이 들 때 외부에서는 기회다 하면서 엉뚱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한다면 기분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해당 양측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본다.
서로 서로 모두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