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의 권유로 가발회사로 전직하다”

0

(주) 코리아나 전병직 회장 회고록 “가발과 함께 50년” (2)

내가 재봉틀판매 회사에 근무하던 시기에 나의 형님은 소규모 가발생산회사 기계기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그런데 당시 가발업계 최대 회사였던 “서울통상(주)”가 형님을 스카웃해 가는 바람에 형님이 근무하셨던 그 회사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 빈자리에 형님이 나를 소개하셨다. 기계기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형님은 나를 앉혀 놓고, 뒤에서 봐주는 조건을 붙이셨던 것이다.

형님은 내게 “현재 근무하는 회사보다 월급이 월등이 많고 앞으로 전망이 훨씬 더 좋으니 와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부족한 부분은 자기의 직장 일과 후에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형님은 나의 손재주와 머리를 믿고 그런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많이 아쉬워했지만, 형님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사실 형님은 나보다 3살 위시지만, 나는 형님의 말씀이라면 아버님처럼 존중하며 순명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었다. 그러기에 형님께서도 항상 신중하게 생각하시고 나에게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다.

형님이 소개해 주신 가발회사에 처음 출근하게 된 것이 1968년 봄으로 기억한다. 한 달을 근무하고 받은 월급이 1만5천원이었다. 당시 말단 공무원의 급여가 6-7천원이었으니 가발공장 월급은 상당했다. 기술이 있는 여직공들은 많게는 2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나이가든 여직공들한테 “시집 언제 가려고 하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공무원하고라도 할까 봐요”라는 농담을 했을 정도로 가발 업계는 호황이었다.

가슴을 졸이며 기술자 아닌 기술자로서 가발업계 첫 직장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가발공장 미싱은 일본제가 대부분이었으며, 모두 특수 미싱이었다. 나의 주 업무는 고장 난 미싱을 수리하고, 미싱 이외 공장 내 모든 기계를 수리하는 일이었다. 여공들부터 생산부장까지도 나이어린 나에게 “기사(技士)님”으로 호칭했다. 사실 미싱을 처음 대했던 나에게는 그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때론 여공들이 야간작업을 끝내고 기숙사에서 잠을 잘 때도 나 혼자 정상적인 미싱을 책상에 놓고, 하나하나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는 일을 반복하며 기계의 원리를 분석하고 익히는 일을 거듭했다. 어떻게 바늘과 실이 지나가고 봉재가 되는지 분석하고 공부했다. 가발 미싱은 일반 가정용 재봉틀과는 달랐다. 바늘이 두 개가 달린 특수 기계도 있었고, 속도도 클러치 모터로 봉재 하는 것이어서 자동차의 악세레터를 밟는 것처럼 속도가 빨랐다. 나는 쉬는 날이 없이 시간만 되면 기계 조작과 수선 작업을 마스터하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형님은 서울통상에서 자기 일과를 마치시고 가끔씩 나한테 들러서 내가 몰랐던 것들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기술을 익혔다. 대부분 스스로 연구하며 배웠다. 어떤 날은 늦은 밤까지 고장 난 기계를 수리했지만 도저히 의문이 풀리지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밤이 너무 늦어 형님께 전화하기도 그렇고 해서, 고심하다 작업 선반 위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어버린 일도 허다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꿈에 형님이 오셔서 내가 몰라서 고민하던 기계고장의 수리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은 여러 차례 있었다. 기독교인 이었다면 아마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다고 할 것이다. 나에게는 늘 형님이 하나님이었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미 가발 공장의 훌륭한 기사님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군대 문제에 부딪쳤다. 보충역으로 편입되어 현역으로 입소하지 않고 예비군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나는 늦은 나이(24세)인 1971년 징집되었다. 3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다시 사회에 복귀했다. 그 사이에 놀랍게도 한국의 가발산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미성상사에 취직하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나는 성남에 위치한 풍국산업의 소규모 하청 업체였던 장갑제조업체에 기사(技士)로 취직을 했다. 입사 후 얼마 안 되었는데 공장 총책임자가 퇴사하는 일이 생겼다. 사장이 나의 성실함 등을 인정 하시고, 나를 공장장으로 총책임을 맡기셨다. 2년여 가까이 이 회사에 근무했었다. 장래 전망이 또렷하지 않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한 끝에 퇴직을 하고, 친구와 함께 가발하청(수제낫딩) 공장을 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1년여가 지났을까? 형님이 또 한 차례 나에게 가발공장(미성상사)에 취직을 권유 하시는 것이었다. 미성상사는 삼천리그룹의 계열회사로 그룹 내 유일한 무역회사였다. 당시 나의 사업체 수제가발 하청공장은 수익이 일정하지 않았다. 동업자였던 친구는 이미 결혼도하고 자식도 있는 터였다. 나는 친구에게 가족이 있으니 일정한 수입이 되는 취직자리를 권하며, 공장은 어떻게 되든 내가 꾸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오히려 나에게 앞으로 결혼도 해야 되는 당신이 취직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양보하던 차, 우리는 두 사람 중 누구라도 괜찮으냐고 미성상사에게 타진했다. 미성상사에서는 나를 꼭 집어 채용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내가 미성에 1977년 1월4일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사업체에 투자했던 금액은 소액이긴 하였으나, 친구는 언제라도 돈을 벌어서 상환키로 했고, 만일 어렵다면 모든 금액은 포기 하겠다고 나는 친구에게 언질을 주었다.

당시 미성상사의 대표이사는 이봉상 상무였다. 그때 나의 나이 만30세였다. 나는 생산관리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봉상 상무는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이것저것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 물어보기도 하시고 나의 기술 아이디어를 관심 있게 들어주셨다. 그리고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회사의 개발실장이 뜻 밖에 사직서를 내고 최용성 고문이 운영하는 공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개발실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이봉상 상무는 나에게 개발실에서 일해보라고 발령을 내셨다. 나는 망설였다. 개발실이란 곳이 여간 중요한 부서가 아니다. 생산직 인원이 6-7백명 되는 회사에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일감을 창출하는 부서가 바로 개발실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경험이 없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모한 일이었다. 인사발령을 거부하는 것은 곧 퇴직이다. 형님과 상의해 보았다. 형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왕에 가발 업계에 뛰어 들었으면, 개발업무에도 정통해야한다. 좋은 기회이니 한번 해보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형님의 이 말씀에 힘을 얻었다. 겁먹기 보다는 기회를 살려보자고 결심하고 개발부서 발령을 받아들였다.

“첫 개발상품 크림프컬을 내놓아 엄청난 인기 얻어”

개발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었던 나는 완제품을 가지고 이 제품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 졌는지를 역으로 과정을 찾아가는 작업을 반복하며 연구하고 공부했다. 당시에는 개발기술을 개인소유의 기술로 생각하고 이런 기술을 누구에게도 함부로 잘 가르쳐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특히 개발의 중요한 포인트는 절대 오픈하지 않았다. 기술 개발자들 가운데 심한 경우는 회사에서 만든 설계서조차도 회사 내에서 공유하지 않고 개인장부에 기록해 놓고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해외로부터 오더가 와도 본인 개발자가 없으면 생산 투입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누구한테 배우지 않고 나 자신이 독자적으로 연구, 개발을 해내야 했다. 나는 스스로 개발에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찾아냈다. 이 때문에 남한테 배워서 익힌 사람들보다 가발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노하우에 깊이가 있었고 몸에 배이게 되었다.

당시에 가발 공장의 개발부서는 이름뿐이었다. 디자인 개발은 주로 해외 바이어들이 스타일 구상을 하여 공장의 개발자에게 설명해서 제조를 요청했고, 여러 차례 실험을 반복해서 이루어졌다. 결국 공장의 개발실은 독자 개발이 아니고 바이어들이 구상한 스타일을 만드는 일에만 국한되고, 독자 개발품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공장의 독자 개발품이 아니기에 바이어들의 횡포가 심했다. 실패를 반복하면서 함께 개발한 상품도 작업은 A공장에서 했더라도 실제 주문 시에는 배송기일(Delivery) 등을 문제 삼아 같은 제품을 다른 공장에 주문 하기도하고 값을 낮추라고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남의 심부름만 할 필요가 있는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우리 회사 브랜드 제품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바이어들의 자기 디자인 제품을 의뢰하면 제조해 주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 우리 제품을 제조해서 구매 하겠다고 하는 바이어들에게만 지역별로 선별해 판매 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회사 고유 브랜드 제품 개발에 전력하기로 다짐했다. 나의 이런 아이디어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시고 밀어 주셨던 분은 당시 이봉상 대표이사 상무이셨다.

나는 이 상무의 강력한 지원으로 나의 아이디어를 소신껏 실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의 작품이 탄생되었다. 크림프컬(CRIMP CURL)제품이다. 성공적인 첫 작품이었다. 주문이 쇄도하고 제품은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이때부터 이 제품들은 흑인용 가발이 되었다. 시장에서는 흑인들의 수요가 급증했다. 미리 주문을 해 놓아도 공장에서 수요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미국 측 수입도매업체들이 상품을 받아도, 받아 놓은 오더를 수요자들에게 보내주기에 역부족이어서 배급을 주다시피 했다고 들었다. 크림프컬을 개발한 시점이 1970년대 후반인데 지금도 대부분의 가발에 크림프컬이 적용되고 있다 가벼우면서 자연스런 컬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후 2년여가 지난 1980년대초 나는 또 다른 획기적인 가발을 개발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Share.